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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에서 발견한 진로 씨앗

아빠의 진로와 딸의 진로

by 담연 이주원

“아빠, 나 또 칭찬받았어!”

환하게 웃으며 수영장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다온이의 얼굴에 보석보다 더 반짝이는 빛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되면서 주 3회 수영을 시작한 지 반년. 처음에는 물안경을 쓰는 것조차 어색해하던 아이가 이제는 깊은 물에서도 자유롭게 헤엄친다. 자유형으로 힘차게 물살을 가르더니, 어느새 배영으로 하늘을 보며 나아가고, 평영과 접영까지 배워냈다.


다양한 활동에 호기심을 보이는 나이라 중간에 가기 싫다 말할 법도한데 끈기 있게 성실히 다니는 모습이 참 이쁘다. 같이 시작한 친구들이 대부분 기초반에 머무르는데 심화반으로 올라가서 언니, 오빠와 수업을 하는 다온이를 보고 우리 부부는 놀라워했지만 정작 다온이 자신은 덤덤했다.

“코치선생님이 심화반에 가서 힘들면 언제라도 다시 기초반으로 오래. 그런데 안 힘들어 재미있어.”

아이의 목소리에는 심화반으로 올라간 기쁨보다 깊은 곳에서 언니, 오빠들과 함께 수영하는 재미가 더 묻어난다. 맹자의 말처럼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는 구절이 떠올랐다. 다온이는 단순히 수영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성취의 감정보다는 물속에서 노는 즐거움이 먼저였고, 바로 그 즐거움이 끈기와 성실함을 이끌어내는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다온이는 어릴 적부터 몸을 움직이는 데 재주를 보였다. 세 살부터 일곱 살까지 발레를 꾸준히 다녔고, 일곱 살 무렵에는 놀이터 구름사다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힘으로 건넜다. 4살 때부터 동네 뒷산을 아빠와 정상까지 올랐고, 체력이 좋아서 아무리 뛰어놀아도 초저녁에 잠드는 법이 없었다. 지금도 줄넘기를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한다. 신체활동은 분명 이 아이의 첫 번째 강점이다.


그런데 또 다른 면도 있다. 학교에서 단거리 달리기를 하면 예선 탈락, 그래도 크게 속상해하지 않는다. 팔씨름에서 져도, “에이, 난 힘쓰는 건 별로야” 하며 대수롭지 않게 웃는다. 구름사다리에 매달리고 쌍둥이 동생들을 번쩍번쩍 들어 올리는 힘센 모습과 달리 경쟁에서는 한 발 물러서는 태도를 보인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내는 어릴 적 자기 모습 같다며 미소 짓지만 부모 입장에서 다소 아쉽기도 하다.


며칠 전 아내와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다온이가 수영 선수가 되면 어떨까?”

"수영대회는 한번 출전해 봐도 좋겠다."

“알아보니 우리 지역은 초등학교 4학년부터 선발을 한다던데?”

“지금처럼 꾸준히 한다면 기회가 올 수도 있겠지.”


하지만 곧 서로 웃으며 더 지켜보기로 했다. 아직은 환상기의 아이. 뭐든 경험하고, 즐기고, 도전할 시간이 필요하다. 중요한 건 이 경험이 단순히 운동 기술 습득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 자신을 알아가고 세상을 탐색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평생을 살아갈 자산이 될 역량을 키울 기회이다.


진로발달이론가 슈퍼(Super)는 아동기를 ‘성장 단계(Growth stage)’라 말했다. 특히 초등 저학년 시기를 환상기(Fantasy stage)라고 설명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직업을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기보다, 놀이와 상상 속에서 자유롭게 그려낸다.


환상기의 다온이가 수영장에서 자신감을 느낀 경험은 단순한 취미를 넘어, 흥미와 강점을 현실과 연결하는 전환점이라 볼 수 있다. “나는 물속에서 잘한다”는 자기 인식은 앞으로 어떤 경험을 선택할 때 중요한 기반이 될 거다.


나는 진로 이론 중에 크롬볼츠(Krumboltz)의 사회학습이론을 제일 좋아한다. 그의 '계획된 우연'은 이 시대에 가장 의미 있는 통찰을 준다. 그는 불확실성이 큰 미래 사회에서 진로는 계획된 목표보다는 계획된 우연(Planned happenstance)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았다. 즉, 우연한 경험이 학습으로 전환될 때, 아이는 자신의 길을 열어간다.


그리고 이러한 우연한 기회를 자기 성장으로 연결하기 위해 크롬볼츠는 다섯 가지 역량을 강조했다.


호기심(Curiosity) – 새로운 활동에 도전하려는 마음

융통성, 유연성(Flexibility) –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다른 길을 받아들이는 힘

낙관성(Optimism) – 실패 속에서도 가능성을 보는 시선

도전, 모험심(Risk-taking) – 두려움보다 도전을 앞세우는 용기

끈기, 인내심(Persistence) –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어가는 자세


다온이가 물속에서 배운 건 단순히 50미터를 완주하는 수영기술이 아니다. 새로운 영법 앞에서 주저하다가도 다시 도전하고 물속에서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호기심과 즐거운 경험,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이어가는 끈기, 동료와 경쟁하면서도 지치지 않고 함께 즐기는 유연성. 이 모든 작은 경험들이 곧 진로역량으로 스며들고 있다.


진로는 아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진로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겪는 일련의 모든 사건”이라고 하지 않던가. 다온이가 50미터를 헤엄치듯, 나 역시 쉰 살(한국식)이라는 나이에서 또 다른 ‘50미터’를 헤엄치고 있는 중이다.


기존 진로이론은 중년 이후를 ‘은퇴 준비 단계’로 설명한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수명은 길어지고, 노동시장은 경력자 중심으로 재편되며, 사라지는 일자리만큼 새로운 일자리와 기회가 생겨나고 있다. 오히려 늦게 피는 성공 사례도 흔해졌다.


그렇다면 쉰 살의 아빠에게도 필요한 것은 은퇴 준비 단계가 아니다. 늦은 나이에 삼남매를 낳았으니 오래 일해야 하고 시대가 변해 건강수명이 늘었으니 더 오래 일해야 한다. 일로서 나의 정체감을 형성하고 삶을 살아가니 50이라는 숫자는 시작의 숫자로 다가온다. 그러니 다온이와 다르지 않다. 호기심을 잃지 않고, 계획이 틀어져도 유연하게 대응하며, 실패에도 낙관성을 유지하고, 새로운 도전에 모험심을 발휘하고, 끝까지 이어가는 끈기를 발휘해서 새로운 도전을 해나가야겠다는 결심을 해본다.


아이와 아빠가 같은 물결 속에서 나란히 헤엄치고 있는 셈이다. 다온이가 새로운 영법을 배우듯, 아빠도 새로운 일과 기회를 배우는 중이다. 진로는 특정 시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이어지는 항해다.


부모를 위한 작은 팁


다양한 경험의 장 열어주기

아이의 흥미가 어디로 이어질지 미리 알 수 없다. 경험의 폭이 넓을수록 우연은 기회로 변한다.

성취와 실패 모두 의미 있게 해석하기

“잘했어”라는 칭찬뿐 아니라 “이번엔 안 됐지만 다음에 다르게 해 보자”라는 대화가 아이의 낙관성과 유연성을 키운다.

함께 성장하는 진로 보기

진로는 아이만의 과제가 아니다. 부모도 새로운 배움과 도전에 열려 있음을 보여줄 때, 아이는 부모를 보고 ‘진로는 평생 계속된다’는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배운다.


다온이에게 수영은 분명히 의미 있는 경험이다. 앞으로의 진로는 예측 불가능한 곡선 위에 그려진다. 중요한 건 방향을 정하는 게 아니라, 경험 속에서 길을 만들어갈 힘을 기르는 것이다.


물살을 가르며 얻은 자신감, 실패해도 다시 도전하는 끈기, 경쟁보다 즐거움을 중시하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다온이가 수영장에서 배우고 있는 진짜 진로 수업이다. 그리고 같은 순간, 쉰 살의 아빠 역시 아이와 함께 새로운 진로를 배워가고 있다. 언젠가 이 작은 파동들이 모여, 우리 모두를 더 넓은 바다로 이끌어줄 것이다.


심리학에서 진로는 이제 특정 시기에 직업을 선택하고 은퇴로 마무리되는 단순한 선형 모형이 아니라, 생애 전체에 걸쳐 끊임없이 설계하고(생애진로설계), 변화에 대응하며(전환역량), 상황에 적응해 가는 과정(성인기 진로적응력)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서 아이가 수영장에서 호기심과 끈기를 키우듯, 쉰 살의 아빠도 다시 배움과 도전을 통해 계획된 우연의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진로란 결국 나이와 무관하게, 우리 모두가 계속 헤엄쳐 나가야 할 삶의 바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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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얼마전 아내가 뜬금없이 체육중학교 링크를 보내줬다. 초등1학년 다온이를 염두에 둔 톡이다. 낙관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하고 싶은 건 별 고민 없이 실천하는 아내가 수영에 흥미를 느끼는 다온이를 보며 국가대표를 상상하고 있다는 걸 이날 알았다. 난 조금 어이가 없어서 답장을 하지 않았다. 2호 축구센터를 함께 다녀온 아내는 흥분하며 말한다. 다온이가 국가대표가 되는 진로로드맵을 가만히 들으면서 미소 지었다. 상상은 자유니깐 꿈은 언제나 원대하게 가질 수 있으니깐. 누구나 현실에 벽을 마주하기 전 이런 상상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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