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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학부모의 마음 달리기

삼남매 운동회를 앞두고......

by 담연 이주원

삼남매 운동회를 앞두고 괜스레 스마트폰 달력을 들여다본다.
작년 첫째 다온이의 운동회는 그야말로 ‘종합 운동회’였다.
엄마 아빠가 번갈아 뛰며 장애물 달리기에 출전하고, 장기자랑 무대에 오르고, 줄다리기까지 총출동했다.
사실 그날은 아이보다 부모가 더 진지했다. 다온이가 기죽을까 봐, “늙은 부모지만 우리 집도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돌아보면 그날은 아이의 운동회가 아니라, 부모의 체력 검증의 날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내 기억에 다온이가 운동회에 참여했던 장면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올해는 사정이 다르다. 쌍둥이가 유치원에 입학하면서 두 개의 운동회를 치러야 한다.

아내는 달력을 보며 한숨을 쉰다.
“다 가지 말까? 너무 힘들잖아.”
그러면서도 이내 회사 월차를 계산하고, 운동회 일정을 냉장고 일정표에 표시한다.
“작년엔 한 명이었고, 올해는 둥이, 둘이니까 당신도 무조건 뛰어야 해.”
말끝에 농담이 묻어 서로 웃었지만, 표정엔 걱정과 각오가 교차해 있다.


다행히 초등학교 운동회는 좀 다르다고 아내가 전해준다.

“캠핑 의자 챙겨가서 그냥 앉아 있으면 된다네.”
아내의 말에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쉰다.
부모가 굳이 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하지만 금세 깨닫는다.
몸은 쉬어라 말하는 늙은 학부모이지만, 마음은 여전히 운동장을 가르며 달리고 싶다는 걸.


며칠 전, 요즘 부쩍 자기주장이 강하고 친구와 노는 걸 좋아하는 쌍둥이가 놀이터에서 손을 흔들며 친구들과 뛰어노는 걸 바라보다가 문득 대학 시절 발달심리학 첫 수업 때 교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부모는 처음엔 아이를 품에 꼭 안고 있지요.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 그 품을 조금씩 열어줘야 합니다.
대신 부모와 아이의 몸에 보이지 않는 끈을 하나 묶어두세요.
아이가 자라 멀리 나가면, 부모는 그만큼 끈을 풀어줘야 합니다.
그러다 아이가 힘들면, 그 끈을 잡고 부모에게 돌아올 겁니다.
부모는 그때 조용히 품을 열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는 그 말이 교과서의 한 구절처럼만 들렸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진다.
아이가 멀리 달릴수록, 나는 품을 넓히는 법을 배우고 있다.
예전엔 다온이 손을 잡고 함께 뛰었다면, 이젠 멀리서 끈의 온도를 느끼며 조용히 응원한다.
그 끈은 여전히 우리를 이어주고, 나는 오늘도 그 끈 끝에서 아이의 웃음을 지켜본다.


초등학교 운동회가 끝난 뒤, 다온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빠, 왜 안 나왔어? 작년엔 나갔잖아. 내가 나오라고 얼마나 소리쳤는데.”
그 말에 가슴이 살짝 저릿했다.
달리지 못한 미안함이 들었지만, 이제는 아이의 무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조용히 말했다.

"오늘 운동회에서 우리 집 대표는 아빠가 아니라 다온이야. 다온이가 열심히 뛰었으니 아빠 기분은 최고로 좋은데. 다음 운동회 때 기회가 되면 같이 손잡고 뛰자."
발달심리학 첫 수업 때 어느 노 교수의 말처럼 부모의 역할은 점점 뒤로 물러나 아이의 리듬을 존중하고, 스스로 달릴 수 있도록 공간을 비워주는 일임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쌍둥이 유치원 운동회에서도 아내는 단단히 선을 그었다.
“당신은 나가지 마. 젊은 아빠 이기려다가 다치면 큰일 나.”
그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난 아내가 한눈을 팔 때 몰래 공 던지기 게임에 나갔다.
아빠가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살펴보던 1호 다온이와 다르게 쌍둥이는 아빠가 나가든 말든 별 관심이 없었다.
한 명과 두 명은 다르구나 싶다. 그저 운동장을 달리며 깔깔 웃고, 넘어지고, 또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며 마음 한편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
그들의 웃음 속에 ‘이제 나 없어도 괜찮다’는 메시지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을 운동회 시즌, 늙은 학부모의 마음은 여전히 달린다. 그리고 그 시간이 소중하고 그 시간에 마음이 복잡하다. 아이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속도를 인정하고 박수를 보내기 위해서다.

아이의 성장 곁에서 우리는 체력보다 마음으로 달리는 법을 배운다.

운동장에서 숨이 차는 것도 의미 있고,
아이 곁에서 한 발짝 물러나 바라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삼남매를 키우면서 비로소 교과서에 당연한 문장 하나하나가 보이기 시작한다.
부모의 진짜 운동회는 부모의 마음이 성장하는 긴 마라톤이라는 걸. 그리고 커가는 아이를 지켜보며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아이를 뒤에서 응원하는 것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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