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증 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무력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어떤 것에도 영향을 미칠 수 없고,
어떤 것도 움직일 수 없으며
나의 의지로는 외부 세계나 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
아무도 나를 진지하게 대우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공기와 같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바로 그런 이유로 특이할 정도로 자주 공격적인 언사를 내뱉고,
다른 사람이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크게 놀란다.
이 놀라움을 따라가 보면 자신이 진지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깊은 확신이 원인으로 밝혀진다.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화시켜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보통 사랑과 호의를 얻는 데 필요한 특성이 자신에게 없다는 결론과
깊은 열등감을 결과로 얻게 된다.
무력감의 또 다른 중요한 결과는 공격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신체적 방어를 못하는 무능력보다
온갖 다른 종류의 공격에 저항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훨씬 더 심각하다.
부당하건 정당하건 자신을 향한 모든 비난, 비판을 그냥 감수하고 반론을 펼치지 못한다.
때로 그런 일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알 때도 있지만 방어하기 위한 말은 한마디도 할 수 없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부당하게 비난, 비판당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조차 없고,
모든 비난, 비판을 정당하다고 느낀다.
심지어 이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행동은 모욕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무능력과
타인이 옳고 자신은 모욕당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확신에서 나온 자발적 감수 사이를 오간다.
"난 원래 그래. 그러니까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이들에게 자신을 바꾸는 것보다 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은 없다.
이런 무의식적인 확신과 의식적인 보상 활동 사이의 간극이 기괴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많다.
이들은 이 의사를 쫓아다니다가 저 의사를 쫓아다니고,
이 종교적 이론, 저 철학적 이론을 따라다니고,
어떻게 하면 자신을 바꿀 수 있을지 매주 새로운 계획을 세우며
엄청난 변화를 안겨줄 애정 관계를 기대한다.
그러나 이 모든 부지런한 행동과 의도적 노력은
그저 깊은 무력감에 빠진 자신을 은폐하기 위한 우산에 불과하다.
무력감은 과보상 행동과 은폐 목적의 합리화로 대체된다.
과보상의 가장 흔한 경우가 분주함이다.
깊은 무력감을 억압한 사람들이 특별히 활동적이고 분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무기력한 인간의 정반대라고 생각할 정도까지 분주하다.
그들은 항상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자기 지위가 위험하다고 느끼면 이들은 위에서 설명한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 무엇도 시도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입증하기 위해서
문제를 자꾸 쌓아가지도, 기적이 일어나리라는 상상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이것저것을 감행하여
위험을 막기 위해 극도로 활동적이라는 인상을 일깨운다.
보통은 자신의 소망이 있을 자리를,
타인이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지에 대한 고민이 차지한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에리히 프롬, 나무생각
06 현대인은 깊은 무력감에 빠져 있다 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