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교육받지 않고, 대안교육할 수 있을까? 배움터에서 학생들 만나며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나눌 수 있을까, 고민이 든다. 대안교육은커녕 공교육의 경쟁 중심 입시 제도에 길들여져 우울과 무기력 속에 지냈던 3년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무엇을 가르칠 건가, 보다 무엇을 가르치지 않을 것인가, 가 더 걱정이다. 내 이유 없이 남들 다 하니까, 당연한 듯 수동적으로 해왔던 나의 자연스러움, 아니 길들여진 습관들이 행여 학생들에게 닿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고민이 더할 적에 배움터에서 함께 공부하는 선생님이 화이트헤드의 <교육의 목적>이란 책을 추천해주었고, 혼자 읽기 버거워하던 찰나에 같이 읽고 나누고 싶다는 동무들도 생겨, 공부하며 지내고 있다.
“학생들은 활기찬 삶을 살아간다. 교육의 목적은 그러한 학생들의 자기 능력 개발을 북돋아주고 이끌어주는 데 있다. ... 그리고 이 전제로부터 자연스럽게 유도되는 결과로, 교사들 또한 생명력 있는 사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이 책 전체는 죽은 지식에 반대하는, 달리 말하면 생기 없는 관념에 반대하는 항의라고 할 수 있다." -34쪽
화이트헤드는 생기 없는 관념으로 교육한다는 건 무익할 뿐만 아니라 해롭다,고 선언한다. 인간성을 각성하게 한 모든 지적 혁명은 언제나 생기 없는 관념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두 가지 원칙을 제안하는데, 첫째는 너무 많은 과목을 가르치지 말라,는 것과 둘째는 가르쳐야 할 것은 철저하게 가르치라,는 거다. 또 어려운 것을 뒤로 미루어둔다는 것은 결코 교육 실천상의 미로를 해독할 아무런 실마리도 되지 못하며, 쉬운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먼저 배워 활동적 지혜를 육성하는 게 교육의 목적임을 강조한다. 가르쳐야 할 관념은 되도록 줄이고 중요한 것만 엄선해서 고르고, 그 관념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결합 가능한 방식으로 머릿속에 구현되도록 힘쓰라 한다.
“교육이란 모두 인생의 직접 경험과의 싸움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고, 당면한 문제에 부딪혔을 때 필요한 사려와 적절한 행동으로 대처하는 준비라고 할 수 있다. 자발성을 환기시키는 것에서 시작하고, 자발성을 고무하는 교육이 아니라면 그것은 실패작임이 틀림없다." -106쪽
미숙한 교사는 조심스럽게 필요한 모든 것을 말했는데도 여전히 기본 세부사항과 정확성을 기하는 일반화를 가르치려 한다든지, 손쉽게 기술을 습득하게 해주려 밀어붙여 진행시키려 한다. 돌아보면 전달자인 내가 전달하려는 관념(가치)에 대한, 나아가 관념의 파장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설명이 과해진다. 다른 일터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에게서도 ‘너무 설명이 과해요.’란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런 모습은 듣는 이에 대한 신뢰 없음의 반영이기도 하다. ‘내’가 원하는, ‘내’ 가 보는, ‘내’ 관점을 이해해주길 바라는, 그리고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하여 불안한 마음의 반증이다. 가르침을 권력의 연장선에 두는 셈이자, 불안을 전가하는 셈이다. 반대로 건강한 교사는 학생이 정확히 알아두어야 할 것을 분명하게 정리하고 있어, 지식을 신속히 익혀 문제에서 활용할 수 있게 한다. 듣는 이의 필요를 알아 주체성, 삶의 운용이 가능성이 돋아나게 한다,고 말한다.
"품격이란 가장 뛰어난 의미에서 교육받은 정신의 최종적인 획득물이다. 그러나 품격이 지식보다도 더 높은 자리에는 운명처럼 형체가 불분명한, 중요한 그 무엇이 있다. 그 중요한 무엇이란 바로 의지의 힘이다. ... 당신의 품격을 염려하지 말고 당신의 문제부터 해결하도록 하라." - 60쪽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게 무엇일까,하는 질문은 결국 나다운 게 무엇일까, 하는 질문으로 닿는다. 그때 눈에 들어온 대목이었다. 나의 품격, 나의 고유성, 나의 스타일, 나의 양식, 나의 언어에 집착하기 쉬운데, 그것이 결국 교육 과정에서 얻는 최종적 획득물이라면, 그 결과치는 언젠가 자연스레 주어지겠거니 생각하되, 지금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추라는 거다. 무엇을 가르치려 하기보다, 내가 잘 살면 되는 것이구나, 누군가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건, 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담보하는구나, 학생들 저마다 문제,는 모두 다르며, 그렇다면 만나는 태도와 배우는 거리도 다르겠구나, 싶어지는 거다.
살면서 잘 살지 못하는 것보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의 괴리가 큰 것이 더 위험하다,는 명제를 종종 떠올린다. 함께 사는 이가 진솔한 자기 고백으로 나누었던 이야기인데, 몇 년 지났어도 마음에 깊이 새겨 있다. 내가 이미 가진 지식의 작은 영역을 적극 활용하고 생활하면서, 무지한 인간으로서의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 그러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렇게 호기심과 능청을 넘나들며 교사이자 학생으로서의 양가적 삶을 담담히 사는 것, 교사의 삶이기 전에 나로서의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