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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눈 Jan 01. 2018

얼꼴.

 



얼굴의 옛말은 얼골입니다. 얼골은 얼꼴에서 왔습니다. ‘얼의 꼴’은 다시 말하면 ‘영혼의 모습’입니다. 그 사람의 영혼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위가 바로 얼굴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였습니다.

                                                                                                                                - 신영복의 <담론> 중에서



수업 첫 시간에 세계관은 안경보다 '망막'과 가깝다는 말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거울로 내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종종 왼쪽 눈 흰자에 있는 거뭇한 색소를 보며 내던져진 삶,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선천성 오타모반이라는 피부병을 갖고 태어났고, 스무 살이 되던 해에 한 달에 한번, 열 달에 걸쳐 얼굴 왼뺨에 자리한 오타모반을 레이저로 지우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 과정에서, 수술 이후에도 아름답다는 게 무엇인지, 수술을 안 했다면 내 삶은 어땠을지, 정상과 비정상, 평범함과 비범함의 기준에 대해 질문은 이어졌다. 외모, 장애, 성 정체성, 가정환경, 등등... 내 의지와 별개로 이미 주어져버린 상황 때문에 생긴 내면의 불안, 바깥의 차별로부터 괴로워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관심이 갔다. 


오타모반 수술을 한 이후로는 몸을 살피는 일이나 꾸미는 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지냈다. 겉치레가 다가 아니라는 관념을 몸으로 깨달았다는 은연의 우월감이 있었다. 진짜 아름다운 건 보이지 않는 거라며 관념과 지식, 바르고 마땅한 도덕과 윤리를 쫓아 책을 읽고, 사람들을 만났다. 자연스레 길 위에서 여러 사건들 돌아볼 수 있었고, 나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찾은 시민사회운동 영역에서, 공부는 늘 해도 해도 모자란 것이었다. 


대안과 진보를 쫓던 현장에서도 주제만 달라졌을 뿐 또 그 영역에서의 속도전과 전략적 경쟁이 있었다. 그때 공부라는 건 만족,이 없었고, 정보를 확보하는 것에 급급한 대상이었다. 정보의 소외에 대해 늘 긴장하고 있었는데, 어떤 때는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소재로 나불대고 있는 그 자체에 자족하기도 했었다. 또 어떤 때는 ‘이 정도’면 ‘그 말’을 ‘그 사람’과 할 수 있는 ‘수준’이 내게 있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내 수준, 자존에 대한 확인을 내가 어떤 말을 하는가,로 여겼던 것 같다.


공유, 소통을 자주 이야기했던 일터에서는 내게 주어진 힘의 한계를 무시한 채로 무리하고 소진하는 것을 헌신이라고 생각하고, 나보다 상대가 더 무리하고 힘들 거라 추측하고 덩달아 무리했던 삶이 있었다. 그러면서 피해의식을 쌓고 어떻게 소통할지 몰라 도망치듯 관계를 끊었다. 책임질 수 없는 남의 감정까지 가져와 진을 빼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며 답답하고 괴롭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돌아보면 함께 무리하는 게 의리라고 생각했고, 그런 형태로 너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소속감을 확보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함께 시간 보내는 동료의 호흡을 따라가는 게 존대하는 것이라고 여겼고, 힘이 들어야, 무리해야 잘 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있었다. 결국 잘 하고 싶고,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내 문제와 사회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스스로를 소진하고 공동체를 소비했다. 기획한 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시종 일희일비했다. 밖에서는 에너지가 넘쳤지만 집에 돌아오면 소진되어 먹는 것, 자는 것은 늘 뒷전이었다. 먹으면 먹을수록 허기졌고. 밤마다 쓰러지듯 잠이 들었지만 아침에 일어날 때 몸은 늘 무거웠다. 무겁고 비대한 몸과 마음에 대한 모멸감과 우울감이 심했다. 일과 사람과 관계에 내 자존을 동일시하고, 일이 실패하거나 관계가 힘들어지면 내 존재가 무너지는 것 같아 도망치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삶의 실존적 고민을 함께 나눌 동지, 동무가 필요했다. 그저 숨 쉬고 싶었다. 그렇게 마을로, 걸음했다.


마을에 와서 마음 공부를 하면서 내 욕망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간다.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와 <누가복음> 성서를 함께 읽으면서 참 공부는 채움보다 비움, 이라는 깨달음이 있었다. ‘공부하면 이다음에 훌륭한 사람이 되고, 뭔가를 얻게 될 거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공부하는 그 순간, 공부와 공부 사이에 있다는 바로 그것이 공부의 목적이자 이유여야 한다. 진정한 공부는 그 자체로 이미 축복이다.’ ... ‘숨이 붙어있는 한 멸균 상태는 없다, 그건 낭만적 사고'라는 선생님의 말이 이해가 되다가도, 그 명제를 붙잡고 헛된 희망에 끙끙대는 스스로가 답답했다. 좋은 가치를 전하고, 그 가치가 체화되면 지금보다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행복의 결과가, 나의 애씀으로 주어진다고 여겼다.


정말 변화하고 싶다면 변화하는 방법을 찾을 게 아니라 변화하면 된다. 스스로가 세운 기준으로 합리화하는 삶이 아니라, 덧대지 않고도 이 모습 그대로도 충분한, 참된 행복, 누리며 살고 싶다. 고민이 정리되지 않는다고 존재가 정리되지 않는 건 아니니까.


2018년, 마을의 동무들과 새로운 공부를 이어간다. 아를 아로, 어를 어로 듣지 못하게 하는 왜곡된 자아, 바로 보고 바로 듣기 위해 내 안의 평화를 찾는, 얼 밝히는 공부 한다. 누적되는 관념에 허우적대기보다, 허겁지겁 공부 한 줄, 따라가는 데 조급해하기보다, 하나를 알더라도 제대로 알고, 배워 알고자 하는 이유 아로새기며 참 용기와 슬기, 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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