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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NP Jan 05. 2022

국사당 이건 사업에 하늘이 노하다.

인왕산 국사당

국사당(國師堂)에 대한 해체 작업이 있던 날. 새벽녘부터 강한 바람에 실려 빗방울이 날렸다. 작업에 열중하던 사람들은 잠시 주춤했던 장마가 다시 시작되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빗줄기는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을 꼬박 쏟아 부었다. 을축년 대홍수, 서울을 삼켜 버린 빗줄기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조선신사 공사가 어느덧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있었다. 공사를 시작한 지 벌써 5년. 흘러나오는 얘기로는 올해 안에는 완공이 될 거라고 했다. 얼마 전에는 조선신사(朝鮮神社)가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 한 단계 격상됐다는 얘기까지 들려왔다.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국사당에 대한 흉흉한 소문은 벌써 몇 해 전부터 돌았다. 다들 쉬쉬하고는 있었지만 입에서 입으로 번져 나간 소문은 이미 마을 전체에 퍼져 있었다. 소문의 내용은 조선신궁이 완공되면 국사당을 민간에 방매(放賣) 하거나 헐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국사당 매각에 대해 허울 좋은 관유재산정리(官有財産整理)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는 누가 봐도 유치한 변명에 불과했다.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신궁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국사당을 눈엣가시처럼 여긴다는 것은 동네 꼬마들도 다 아는 내용이었다. 흉흉한 소문 때문이었을까. 벌써 며칠째 국사당에서는 굿판이 벌어지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리고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끊이지 않았던 굿판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 국사당의 역사는 조선의 역사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태조대왕께서 한양에 새 터를 잡고 2년 만에 서울의 안산(案山)인 이곳 남산 정수리에 국사당을 세웠다는 말씀과 함께. 남산에 세워진 최초의 건축물이었던 국사당은 당시 목멱신사(木覓神祠)라 불렸고, 그 이유로 인경산(引慶山)이라 불리던 남산도 목멱산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했다.


밤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7월의 어느 날. 아직 첫닭이 울지도 않은 이른 새벽에 뒷집 김씨가 주섬주섬 대문을 밀고 들어섰다. 초췌한 얼굴, 핏발 선 두 눈. 밤새 한숨도 못 잔 모양이었다.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국사당 해체 작업은 자신이 해야겠다고, 그리고 그 날이 오면 자신을 좀 도와달라고. 무당으로 살다 짧은 생을 마감한 그의 모친 때문일 거라 짐작만 할 뿐 나는 더 이상 이유를 묻진 않았다. 다만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을 뿐이었다.


초췌한 그의 얼굴 위로 20여 년 전 젊은 아낙의 손에 이끌려 마을로 들어서던 열 살 남짓한 사내아이의 모습이 겹쳤다. 아이는 손재주가 좋았다. 그래서 어미가 무당임에도 마을 사람들은 그 아이를 참 귀여워했다. 목수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국사당의 크고 작은 수리를 도맡았고, 그 일은 제 어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계속됐다.

나는 김씨가 지시하는 대로 간단한 장비 몇 개만 챙겨 그의 뒤를 따랐다. 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장정 대여섯 명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아마도 김씨가 전날 뽑아 놓은 일꾼들인 모양이었다.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한 나와 일꾼들은 아무 말 없이 김씨의 뒤를 따랐다.  


저 멀리 하얀 천을 둘러놓은 조선신궁 공사 현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날도 밝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지만 경비는 삼엄했다. 지난 5년 동안 이 길을 지나 본 조선인은 없었다. 허락 없이 이곳에 얼씬대는 조선인은 그가 누구든 총살시키겠다는 엄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덤덤히 발걸음을 옮기는 김씨와 달리 그의 뒤를 쫓는 우리들의 발걸음은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국사당 주위로는 벌써 제법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모두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몇은 낯이 익었고, 또 몇은 낯이 설었다. 아마도 국사당이 헐린다는 소식에 타지 어디에선가 올라온 무당들일 게다. 국사당이 헐리지 않고 이렇게 다른 곳으로 이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 무당들이 십시일반해 기금을 모은 덕분이었다. 김씨는 그들 중 한 명과 대화를 나누고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그의 손끝에선 한 치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을 비운 듯 덤덤해 보이기까지 했다. 땅, 땅, 땅. 새벽을 깨우는 망치 소리가 신호였을까. 세차게 몰아치던 바람 속에서 마침내 빗방울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이제껏 입을 다물고 있던 김씨의 목소리가 빗방울 너머 나지막이 들려왔다.


“그래도 인왕산 자락으로 옮긴다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인왕산 선바위 터는 태조대왕과 무학대사의 얼이 깃든 기도처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오늘은 해가 뜨지 않을 모양이네요.”



PS

남산에 있던 국사당이 언제 인왕산으로 옮겨졌는지는 정확한 자료가 없어 알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1925년 7월 중 남산에서 인왕산으로 옮겨졌다고만 알려져 있는데, 이 역시도 1925년 7월에 국사당의 해체 작업이 시작되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해체된 국사당이 1925년 7월에 인왕산으로 옮겨져 복원되었다는 것인지 확실치가 않다. 하지만 1925년 6월 15일자 동아일보에 사진과 함께 소개된 ‘남산 국사당’ 모습과 ‘무학(舞鶴)재로 간 국사당(國師堂) 큰 굿을 한다’는 제목의 1926년 5월 10일자 매일신보의 기사를 근거로 판단했을 때, 국사당은 1925년 7월 중 남산에서 인왕산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그 당시부터 본격적인 해체 작업이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게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이 글에서는 위와 같은 자료에 근거해 1925년 7월경 국사당에 대한 해체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전제하고, 을축년 대홍수와 국사당 해체 작업을 연계해 이야기를 전개한 것임을 밝힌다.


참고 자료

문화재청 홈페이지 www.cha.go.kr

동아일보 1925년 6월 15일자

매일신보 1924년 11월 24일자

매일신보 1926년 5월 10일자

송파1동 주민센터 앞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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