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NP Jan 05. 2022

액운을 쫓는 한국의 토종개

경산 삽사리테마파크

황이는 늘 형들이 부러웠다. 큰형은 홍보견으로 그리고 작은형은 치료견으로 연구소 내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황이는 소심한 성격 탓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내는 일이 없었다. 연구소 직원들은 황이의 기운을 북돋워주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결과는 늘 만족스럽지 못했다. 실패에 실패가 더해질수록 황이는 더욱 소심해지기만 했다.


요며칠 황이는 견사에서 나오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 황이를 유심히 바라보던 장군이 할아버지가 황이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장군이 할아버지는 15년 동안 이곳에서 종견으로 활동하다 지난 달 은퇴한 육종연구소의 터줏대감이었다.

- 우리 황이가 요즘 왜 이리 힘이 없누?

- 아니에요. 그냥 좀 피곤해서요.

- 허허, 그래? 황이 오늘 이 할애비하고 오랜만에 산책이나 다녀올까?

- 산책이요?

산책이란 말에 황이의 얼굴에 금방 화색이 돌았다. 황이는 어릴 때부터 장군이 할아버지와 산책하는 걸 제일 좋아했었다.


그날 밤. 연구소 직원들이 다 퇴근한 후, 장군이 할아버지와 황이는 견사를 빠져나왔다. 모두가 잠든 밤. 주위는 고요했다. 황이는 장군이 할아버지를 따라 큰길까지 나왔다. 이 길은 황이도 자주 다녀 본 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이상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주위의 모습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이슬이 내려 차갑던 아스팔트는 보드라운 흙길로 변했고, 벽돌과 콘크리트로 지은 네모반듯한 집들은 둥글둥글 모나지 않은 초가로 그 모습이 바뀌었다. 당황해 하는 황이에게 장군이 할아버지는 괜찮다는 듯 한쪽 눈을 살짝 감아보였다. 마침내 밤길을 밝혀주던 가로등마저 사라져 버렸다. 불 꺼진 거리는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하지만 황이는 걷기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순간 황이는 얼마 전 장군이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 할아버지! 할아버지! 정말이에요.

- 뭐가 말이냐?

- 할아버지가 그러셨잖아요. 세상은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고요. 보세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길을 제가 이렇게 편하게 걷고 있어요. 청각과 후각에 의지해서요.

- 허허, 녀석. 그래 우리 삽살개들은 그만큼 예민한 청각과 후각을 가지고 있단다.

황이는 어두운 길을 마치 대낮처럼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신기하고, 또 대견했다.

- 할아버지, 근데요. 저는 사실 '삽살'이라는 우리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요.

황이의 엉뚱한 질문에 장군이 할아버지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황이를 돌아보았다.

- 이름이 마음에 안 든다? 왜 그렇지?

- 삽살이라고 하면 왠지 가벼워 보이잖아요. 삽살, 삽살.

황이가 까불거리면 말했다.

- 가벼워 보인다. 어감은 좀 그렇구나. 하지만 황이야 절대 그렇지 않단다. 가만히 생각해 보렴. 우리나라 토종개 중 순수하게 자기의 이름을 가진 경우가 우리 말고 또 있더냐?

황이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 아랫동네 진돗개, 그리고 저 윗동네 풍산개들은 모두 지명에서 이름을 따온 경우였다.

- 정말 그러네요. 그럼 혹시 '삽살'이라는 것도 옛날 어느 지역의 이름이 아니었을까요?

- 허, 그 녀석 의심은. 아니란다. 삽살이란 이름에는 '살(殺)을 퍼낸다'는 의미가 담겨있단다. 사람들이 삽을 이용해 흙을 퍼내 듯 우리는 살을 퍼내는 게지.

- 살을 퍼낸다? 그럼, 사람들이 우리보고 액운을 쫓는 개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것 때문인가요?

- 그 녀석. 머리 하나는 비상하구나.

장군이 할아버지는 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황이와 장군이 할아버지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야트막한 언덕 아래 도착했다. 언덕 위에서 사람들의 기합소리가 들려왔다. 장군이 할아버지와 황이는 언덕 위로 올라섰다. 늦은 밤이었지만 한 무리의 사람들이 횃불을 밝힌 채 무예를 연마하고 있었다.

- 할아버지 여기가 어디에요?

- 이곳은 연무장이란다. 군사들이 훈련을 받던 곳이지. 황이야, 저기 연무장 끝에 불쑥 솟은 작은 언덕 보이니?

황이는 할아버지가 쳐다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덕 위의 또 다른 언덕. 그 위에 키가 훤칠한 젊은 장군이 군견을 앞세우고 군사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 예. 보여요.

- 저기 서 계신 분이 바로 김유신 장군이란다.

- 김유신 장군이요?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룬, 그 김유신이요?

- 그래, 그리고 말이다. 그분 옆에 있는 군견은 너의 오랜 조상이란다.

'나의 조상?' 황이는 자세히 보려고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윤기 흐르는 긴 황색털이며 얼굴의 이목구비가 자신과 꼭 닮아있었다.

- 우리 삽살개들은 군견으로서도 인정을 받았단다. 특히 너희 조상인 저 삽살개는 전시에도 김유신 장군과 함께 전장을 누볐지.

- 그럼 실제 전투에도 참가했단 말인가요?

- 그렇지는 않아. 우리 삽살개는 사람을 공격해 죽일 정도로 포악한 성정은 못되니까. 다만 다른 그 어떤 개들보다 충성심이 강하고 감각이 예민해 호위견으로서는 그만이었지. 너도 조금 전에 온몸으로 경험해 보지 않았니.

- 와, 그럼 제 몸에도 저 멋진 군견처럼 호위견으로서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말씀이시네요.  

장군이 할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첫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 자,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구나.

황이는 아쉬움에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하지만 이제 황이는 어제의 소심한 그 황이가 아니었다. 새로운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황이는 고개를 돌려 김유신 장군 옆에서 늠름한 모습으로 서 있는 삽살개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 할아버지. 저 훈련 열심히 해서 우리나라 최초의 대통령 경호견이 될래요.

- 대통령 경호견? 허허 녀석 꿈 한번 크구나. 그래 꿈이란 모름지기 크게 가져야 하는 법이지. 어디 한번 열심히 해 보거라. 할아버지도 지켜 볼 테니.

신이 난 황이는 장군이 할아버지를 앞질러 저만치 달려 나갔다. 때마침 수평선 위로 붉은 태양이 솟았다. 황금빛으로 물든 도로 위에 황이의 긴 그림자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사이 시간은 1500년의 세월을 거슬러 다시 2022년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스토리가 있는 여행 길

경산시 하양읍 대조리에 위치한 삽사리테마파크는 우리나라에선 유일하게 삽살개(천연기념물) 혈통 보존을 위해 만들어진 연구소다. 연구소 내에는 삽살개들이 생활하는 견사와 훈련소가 갖춰져 있으며, 훈련소 옆으로 연구소 사무실이 자리한다. 삽살개들이 생활하는 견사는 종견과 훈련견이 생활하는 곳으로 나뉘어 관리되는데, 아쉽게도 두 곳 모두 일반에 공개되진 않는다.

연구소 견학은 삽살개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훈련 모습 관람으로 진행된다. 관람 뒤에는 삽살개와 함께 사진을 찍는 포토타임도 주어진다. 단, 이들 프로그램은 상시 진행되는 것이 아니므로 사전에 미리 견학 가능한 시간을 확인한 후 방문하는 게 좋다. 문의 053-856-0370 www.sapsaree.org


매거진의 이전글 국사당 이건 사업에 하늘이 노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