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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신 Aug 01. 2021

신화창조 神話創造 신화창조 新話創造

박지은과 키즈키의 작업에 관하여

이 글은 을지로의 전시 공간 Pie에서 열린 박지은 작가와 키즈키 작가의 2인전 《신화창조 神話創造 - 신화창조 新話創造》(2021. 4. 9 ~ 2021. 5. 2)의 글입니다.



윤형신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박지은과 도쿄에서 활동하는 키즈키의 작업이 2021 년 서울의 자생적 전시공간에 모였다. 그림이 서로를 마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다르면서도 닮은 두 작가의 작업은 각자/서로가 참조하는 전통 외에 동시대의 미디어 환경이라는 기반을 공유한다.


    불교의 사천왕을 모티프로 하는 박지은의 소녀사천왕 시리즈는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신의 이야기를 그린다. 작가가 2019년부터 진행한 소녀사천왕 시리즈는 중심 서사가 담긴 두루마리와 단편적인 장면을 그린 화판으로 구성된다.


    동서남북의 하늘을 지키는 지국천왕(持國天王) 광목천왕(廣目天王), 증장천왕(增長天王),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다문천왕多聞天王) 불계의 중심, 수미산을 관장하는 제석천(帝釋天 /인드라) 지령을 받아 각자의 임무를 수행해 왔다. 그러던 어느  우연한 일을 계기로 서로를 마주한 사천왕은 악귀와 악당 아수라의 뒤를 쫓기위해 서울로 내려온다. 상사인 제석천의 연락이 끊겼으나 추적을 이어가던 이들은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인 아수라의 포스터를 길에서 발견하고 익명의 납치 사진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라온 것을 보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아수라를 맞닥 뜨린 사천왕이 장렬히 패배한 장면으로 파트 4 마무리되며,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서화실에서 펼쳐지는 파트 5 이야기가 새롭게 전개된다.


    박지은은 전통적인 회화와 현대적인 매체가 서사를 연출하는 방식을 결합한다. 작가는 동양주의적인 관점에서 한국과 중국, 일본의 문화를 참조하면서도, 작품을 보는 이들이 무엇을 ‘동양으로 보는가에 흥미를 느낀다. 그는 먹의 미묘한 색감과 석채의 반짝임에 홀린  매료되지만, 한편으로 먹이 아닌 검정색 물감이나 그래픽 툴의 브러쉬와 같이 혼동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를 그림에 숨긴다. 이와 더불어 작가는 애니메이션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뚜렷히 드러낸다. 세일러문과 같은 변신소녀물에서 주인공들이 각자의 능력과 무기를 지니듯 박지은의 사천왕 또한 서로 다른 능력과 지물을 지닌다. 동시에 그의 그림에서 자주 보이는 인쇄물 느낌의 빗금과 배경, 소리와 광선 표현은 만화의 형식을 차용한 것이다. 하나 책장을 넘기며 읽는  만화와 스크롤을 내리며 감상하는 웹툰의 연출이 다르듯,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두루마리의 서사 연출은 차이를 지닌다. 때문에 그림에서 인물은  화면에 시차를 두고 등장하며, 서사와 구도는  화면을 이용하기 위해 대개 두루마리의 왼쪽을 향해 진출·후퇴하는 방식으로 그려진다.


    사천왕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작품을 전시장 밖에서 선보이는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로 작가가 사용하는 인스타그램은 소녀사천왕의 서사를 해체하고 재결합한다. 전시장에서 그의 두루마리는 서사를 그린 그림이자 미적인 대상으로서 한눈에 전체를   있도록 전시 된다. 하나 인스타그램에서 가로로  두루마리는 사각형 포맷에 맞춰 잘려나간다. 이에 서사를 설명하는 그림의 속성은 줄어들게 되는데, 이를 보충하기 위해 작가는 이미지 아래에 그림을 그린 경위나 내용을 적는다. 이로써 근대에 ‘순수한 예술 되기 위해 그림에서 떨어져 나간 글은 서사를 보충 설명하는 지위로나마 이미지의 곁으로 돌아온다.


    재미있는 것은 본래 두루마리가 지금의 스마트폰처럼 손에 쥐고 읽어 나가는 매체였다는 점이다. 양쪽이 말린 두루마리와 세로로 긴 스마트폰은 엄지손가락과 다른 손가락이 마주 보는 신체 구조를 반영한다. 다시말해 양손에 쥐고 조금씩 펼쳐가며 감상하는 두루마리, 그리고 스크롤을 아래로 내리는 스마트폰은 모두 엄지손가락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두루마리가 한쪽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연출한다면, 인스타그램의 피드에서 소녀사천왕의 서사는 잘게 쪼개진 채 흐르며 보는 이가 손가락을 굴려 읽어감에 따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인스타그램의 이미지는 소녀사천왕의 중심 서사보다는 사천왕의 캐릭터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 등장인물의 단편적인 일상은 그들을 인격을 지닌 존재이자 덕질이 가능한 아이돌로 부상시킨다. 빌런이자 인플루언서로 설정된 아수라는 이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캐릭터로, 실제의 SNS 계정(@ssu.raa)을 지닌 인격체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와 더불어 화판 형태의 그림 또한 소녀사천왕의 서사를 넘어간다. 한 예로 영화 영웅본색을 패러디한 〈천왕본색〉(2019)은 팬들을 위해 연출한 아이돌 화보의 성격을 지닌다. 대중스타가 방송의 서사 밖에서 각자의 인생을 살듯 사천왕은 소녀사천왕 시리즈 너머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이로써 과거 악귀를 퇴치했던 무서운 신은 우리 곁에 있을 법한 친근한 존재로 거듭난다.

 

    박지은의 사천왕은 새로운 세계와 좌충우돌 마주치는 동적인 존재다. 〈접부채  소녀사천왕〉(2019)에서 부채 안에 그려진 증장천은 부채 밖으로 팔을 뻗어 자신을 둘러싼 프레임을 그린다.  만화  캐릭터가 분절된 시공을 뛰어넘어 하나의 주체로 움직이듯 박지은의 사천왕은 한국과 일본, 대만과 중국에서 만든 서로 다른 역사적 맥락을 가진 종이를, 자신의  앞에 펼쳐진 세계를 아랑곳하지 않고 가로질러 달린다. 이들은 어딘가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키즈키는 모든 자연물에 영이 존재한다고 믿는 애니미즘의 관점에서 자신의 감정과 자연현상을 그린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상상은 조상숭배 관념과 불교, 애니미즘이 결합한 일본 신도(神道)의 “팔백만의신(야오요로즈노가미,八百万の神)”에 가까운 것이다. 이 같은 관점이 반영되어 작가가 그린 풍경과 사물은 영혼을 지닌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의 그림에 나타난 존재들은 인간이 지니는 현실적인 욕망 대신 세계와는 반대로 흐르는 정념을 지니며, 꿈이나 지평선과 같은 현실 너머의 불안정한 세계를 맴돈다.


    이번 전시의 그림들은 상대에게 닿지 못한 감정이 무한한 공간을 흘러가는 장면을 담는다. 그중 〈도피기행(逃避紀行)〉(2021)은 해 질 무렵의 적막한 고속도로를 그린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 두 사람이 어디에서 떠나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쓸쓸한 풍경 속에서 변화하는 기분과 생각은 도로 위를 스치는 얼굴로 나타난다. 어둠과 침묵 속에 시간이 흐르고 이들의 관계에 변화가 생길 무렵 목적지 없는 드라이브는 끝이 난다. 한편 소통 불가능이 불러일으키는 차가운 감정은 연인 사이인 기계인형이 무표정한 얼굴로 얽혀있는 〈picnic Date〉(2021)에서도 보인다. 끝없이 펼쳐진 무한 공간 속에서 기계의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는 이들은 공감과 소통에 대한 인간적인 기대를 저버린 채 자신들의 세계를 쌓아 올린다.


    하드코어 테크노(hard core techno), 그리고 퓨처 펑크(funture funk) 장르의 음악을 즐겨 듣는 작가는 감정을 그리는 일을 음악을 만드는 일에 빗댄다. 〈picnic Date〉에서 이미지는 반복되며 파장과 같은 효과로 그림을 바라보는 이의 몸속을 흔든다. 상대에게 닿지 않는 감정을 표현한 〈연애감정(恋愛感情, flowmix)〉(2020)에서도 우산을 들고 있는 캐릭터와 함께 반복되는 이미지는 빗소리를 연상시키고, 〈일과(一過)〉시리즈 1~3 (2021)의 비어 있는 플라스틱 CD 케이스는 전시장의 그림이 음악이 담긴 CD 의 은유임을 암시한다.


    키즈키는 밑그림을 옮겨 그리는 전통적인 기법을 활용하며, 컴퓨터로 변형한 이미지를 곧바로 종이에 옮기기도 한다. 자신이 창작한 존재를 계속해서 복제하는 그의 그림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가장한 인공물을 의미하는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개념과 맞닿아 있다. 작가에 따르면 〈protect-twins〉(2021)에서 검게 드리워진 그림자는 주인공의 죽은 쌍둥이를 의미하며, 컴퓨터로 확대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연애감정〉의 픽셀 이미지는 소통의 상실과 세계의 냉혹함을 뜻한다. 이와 더불어 분열·융합하는 비정형적인 형상과 일정하게 축소·확대되는 수열(數列)과 같은 형상은 화면 위에 중첩되어 원근법적인 공간을 만든다. 그러나 반복이 언제나 무의미로 머무르는 것은 아니며, 시간의 경과와 존재의 성장을 보여주는 변주된 이미지들은 화면 전체를 휘젓는 동력을 창출하기도 한다.


    시간에 관한 작가의 관심은 회화뿐 아니라 사진과 설치를 비롯한 작업 전반에 드러나는데, CD 케이스와 종이에 그린 드로잉, 풍경을 찍은 사진으로 구성된 〈일과〉 시리즈는 이를 감성적으로 보여준다. 먼저 ‘일과(一過)’라는 제목은 스치듯 지나가는 일상의 순간을 의미한다. 투명 CD 케이스 의 동백꽃은 일몰 무렵의 짧은 시간 동안 그려진 것으로, 창틀에 설치되어 바깥 풍경과 빛의 변화를 전시장 내부로 투영한다. 여기에 더해 케이스 안에 접혀 들어간 얇은 그림 또한 가변적인 느낌을 주며, 동백꽃을 배경으로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사진 속 캐릭터는 혼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지는 않았으나, 키즈키의 홈페이지(https://tuki3xxx.tumblr.com)와 인스타그램(@kizuki_ooo)의 사진과 영상은 작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종이에 그린 그림을 불태우는 영상에서 이미지는 종이와 함께 소멸하지만 동시에 우그러들어 움직이며 살아 있는 듯한 모습으로 변한다. 한편 투명 필름에 유성펜으로 그린 그림을 물이 담긴 대야에 넣고 물이 일렁임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은 이미지와 물의 동적인 만남을 포착하고 있으며, 〈연애감정〉에서와 같이 일그러뜨린 이미지가 등장하는 회화 작업을 연상시킨다.


    키즈키는 신도와 애니메이션에 영감을 얻어 이미지를 변주한다. 그의 그림에서 이미지는 대상의 움직임을 뒤쫓는 잔상이자 정지된 화면을 움직이는 동력이다. 프레임을 연속적으로 바꾸며 움직임을 만드는 애니메이션처럼, 작가는 복제된 이미지를 화면 위에 나열하며 회화에 애니메이션 트레일러의 속도감을 만들어 낸다. 이와 더불어 키즈키의 작업은 매질과 같이 그 자체로 흔들리며 이미지를 투영하고 왜곡한다. 영상과 사진에서 물과 공기는 신이 깃든 파도와 바람이 되어 이미지에 약동하는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이미지를 움직이게 하는 애니메이션(animation)이 애니미즘(animism)과 어원 ‘아니마(anima, 영혼)’를 공유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미지를 변주함으로써 신도와 애니미즘, 애니메이션을 가로지르는 키즈키의 작업의 축을 발견할 수 있다.




전시:《신화창조 神話創造 - 신화창조 新話創造》

작가: 박지은, 키즈키

기간: 2021. 4. 9 ~ 2021. 5. 2 pm 1~6

공간: Pie

기획 및 주최: Pie

서문: 이십칠

글:  윤형신

포스터: 소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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