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연 칼럼
입춘이 지났다. 새해의 첫 절기로 봄이 시작됨을 알리는 입춘이. 하지만 서울은 아직 춥다. 입춘과 어울리지 않는 눈이 푹 내리기도 했다. 쌓인 눈은 금방 녹아내렸지만, 찬기를 머금은 바람은 그칠 줄을 모른다. 매일 일어나 잠시 옥상에 올라갈 때면 그제야 어제와는 다른 오늘의 날씨를 체감한다.
작업실의 보일러는 한겨울에 한번 얼어버렸다. 영하 십삼 도까지 내려가는 때 며칠간 비워두었더니 수도관이 꽁꽁 얼어 작동하지 않았다. 다행히 머지않아 보일러가 작동되었지만, 역시 추운 것은 싫은지라 그 이후로 작업실에 없을 때도 보일러는 끄지 않고 항상 가장 낮은 온도로 맞춰놓았다. 물이 계속 돌면서 수도관이 얼지 않도록.
그런데 2월이 되니 차츰 눈치를 보게 된다. 계속 켜 놓으면 가스비가 나갈 테고, 이제 입춘도 지난 2월이니 슬슬 따뜻해지지 않을까 하면서 보일러를 꺼 놓으면 다음날은 어김없이 춥다. 역시 켜 둘걸, 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다시 작업실을 나설 즈음 보일러를 끌지 말지 고민한다. 오늘은 추웠으니, 내일은 조금 따뜻해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하면서 켜 두고 가면 다음날은 조금 따뜻해지는 아이러니함이란.
이렇듯 2월의 날씨는 겨울과 봄을 오간다. 내일의 날씨는 내일이 되어보아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조금 가벼운 옷도 괜찮을지, 목도리를 둘러야 하는지도 내일밖에 나가보아야 감이 온다. 봄이 올 즈음이라 해도 완연한 봄도 또 겨울도 아니기에 어느 날은 겨울이고 또 어느 날은 봄이다.
2월의 어느 날
그런 2월의 어느 날, 겨울과 봄의 눈치를 보며 옷을 고르는데 문득 삶에도 계절이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인생에 크게 자리 잡아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봄으로 인생을 시작한 사람은 반드시 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까지 겪는다고 했다. 화창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뜨거운 청년기를 보내며 가을 같은 중년을 보낸 뒤 겨울 같은 노년을 보내는 것이랄까. 반대로 가을로 삶을 시작하는 사람도, 여름이나 겨울로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언제부터 딱 여름이고 언제부터 딱 가을이 되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천천히 그리고 반드시 모든 계절을 겪는다고 했다.
나의 시작은 겨울이었다. 그간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추웠다. 겨울도 한 겨울이라 따뜻해질 기대도, 봄이 오는 냄새도 모르고 살았다. 어쩌다 춥지 않은 날에는 어차피 다시 추워질 것이라며 무시해버렸다. 그 잠깐의 따뜻함 속에서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앞으로 계속 겨울일 테고 봄을 믿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영영 겨울 속을 살아가야 한다며 낙담하고 희망을 버렸다.
견디고 견뎠다. 포기하기도 했다. 다시 걷기도 했다. 그러다 지치기도 했다.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 시간의 흐름도 겨울처럼 같이 얼어버린 줄 알았는데, 쉬지 않고 흘러갔다. 나의 한 계절을 끝낼 만큼이나 흘러갔다.
아무것도 믿지 않고 꾸역꾸역 살아냈을 뿐인데 지금 나의 삶은 2월에 닿았다. 봄이 올 때 즈음이면서 어느 날은 불쑥 찬 바람이 불어와 겨울만큼 춥다. ‘왜 이렇게 춥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아직 2월이니까 그럴만하지’라는 이해가 섞여 있다. ‘이제 따뜻해질 때가 됐는데’라고 생각하면서 추운 날, 따뜻함을 기대한다. 앞으로도 ‘추울 것이다’가 아니라 앞으로 ‘더 따뜻해질 것이다’는 기대를 한다.
슬슬 바람에 봄 냄새가 섞여있다. 다시 불쑥 추워질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반드시 봄이 오게 된다. 조금 더 기다리면 봄은 온다. 겨울은 지나가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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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수연
*<조금 우울하지만, 보통 사람입니다>(다산북스)
* <슬픔은 병일지도 몰라>(반니) 저자
* 독립출판 소설 <자화상>(단편소설집 RED) 제작 및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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