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 일기
"약을 정말 많이 드시네요."
얼마 전이었다. 코골이 때문에 이비인후과 진료를 보았는데, 과거에 내가 응급실로 몇 번 찾았던 병원인지라 내 의료기록이 남아있는 듯했다. 자세하게 뭐라 적혀있는지 볼 수 없었지만, 언뜻 보니 '자살 시도'라든가 '약물 과복용'같은 단어가 보였다. 이런. 다들 아닌 척하면서 내 상태를 관찰하고 다 적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약 많이 먹는 건가요?"
"아무래도 그렇죠."
나야 남들이 약을 얼마나 복용하는지 알 턱이 없으니, 내가 먹는 약이 많다거나 적다거나를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주치의의 말로는 약물 내성이 강하고 약효가 별로 없는 체질임은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식욕을 올려주는 약을 처방해도 음식을 먹지 않았고 항 갈망제(알코올 의존증 치료제)를 복용했을 때도 술을 마셨다. "약 알레르기가 있나요?"라는 질문 또한 내겐 아주 무색한 물음이었다. 알레르기는커녕, 효과가 없을까 봐 걱정인 게 약이었다.
"벌써부터 양압기를 쓰긴 그렇고, 알레르기 약을 처방해 드릴게요."
이비인후과 의사는 코골이 수술을 해도 별 효과가 없을 수 있다며 수술을 추천하지 않았다. 대신, 알레르기 때문에 코를 골 수 있으니 약을 처방해 주겠다고 했다. 그렇다. 그렇게 나는 또 약이 늘었다. 정신과 약과 알레르기약, 위염약. 이것저것 더하다 보니 저녁 약만 열 알이 넘었다.
너 그거 의존이야
가족 점심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차 안. 세 살 터울의 오빠가 속이 안 좋은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바로 가방을 뒤적거렸고 소화제를 찾아내 오빠에게 건넸다. 약국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약이었다. 소화가 조금 될 무렵엔 "근데 머리도 좀 아프다. 타이레놀 있어?"라고 물어왔고 나는 다시 가방을 뒤적거린 뒤 타이레놀을 건넸다. 이거 뭐, 도라에몽도 아니고. 겔포스, 지사제, 타이레놀, 소화제는 늘 내가 들고 다니는 약이었다. 나는 오빠에게 한마디 더 했다.
"항불안제도 있어. 아쉽지만 이건 처방전이 있는 사람만 복용할 수 있어서 줄 수 없네."
"너 많이 먹어."
오빠는 딱히 탐나지 않아 했다. 공황장애를 겪어봤다면 이 약이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알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이거 꽤 좋아하는 약이라고."라며 항불안제를 옹호하기까지 했다. 줄 수 있어도 안 줄 거라면 서. 그러면서 이 약에 관한 음악을 추천해주기도 했다.
"빌리 아일리쉬의 Xanny라는 음악 있잖아. 그 음악에 나오는 약이 이거란 말이지. 음악이 좋아. 다음에 한번 들어봐."
"너 그거 의존이야."
"약이 없으면 몸이 제대로 안 굴러가."
그랬다. 약이 없으면 몸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밤에는 정신과 약을 먹어야 잠을 자고 음식을 먹으면 소화제를 먹어야 하고 배가 아프면 지사제를 먹게 되고 불안하면 항불안제, 머리나 허리가 아프면 타이레놀을 먹어야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거기에 감기나 염증이 생기면 항생제까지. 생각해 보면 정신과 약도 슬슬 줄여도 괜찮은 시기인 것 같은데 나는 여전히 약을 줄이지 못하고 계속 조금씩 늘어났다. 일상생활은 하는데, 이게 하는 게 맞는지 알 수 없는 느낌. 약으로 연명하는 느낌.
그런 걸까. 나는 정말 의존증인 걸까.
마음이 쉬어가는 알약
의존 : [명사] 다른 것에 의지하여 존재함.
의존이 의지하여 존재하는 것이라면 아무래도 나는 약에 의존하는 것 같다. 약이 없다면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스멀스멀 들기 때문이다. 주치의 또한 약을 조금씩 줄이려 노력해 보아도 내 마음은 쉽게 약을 줄이게 두지 않았다. 거부반응을 보이고 오히려 반동처럼 망가지기 십상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약을 조금이라도 조절할 땐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얘기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인데놀 0.5mg이 실수로 누락되었을 때도 주치의는 섬세하게 내 기분을 살피며 사과를 할 정도였다.
"수연 씨, 약을 좀 줄여보는 게 어때요?"
약을 줄여보라고 제안한 것은 주치의가 아닌 직장 동료였다. 주치의는 차마 하지 못한 얘기를 별 신경 쓰지 않고 할 수 있는, 적당히 무심한 관계에서 오는 당연한 물음이었다. 직장에선 제대로 일을 하고 있으니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약을 한 아름 먹는다는 것을 알고 의아한 듯했다. 나 역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어 에둘러 말했다.
"그래야 하는데, 어렵네요."
"뭐가 어려워요?"
"약을 줄이면, 다시 최악이었던 순간으로 되돌아갈까 봐 무서운가 봐요."
그 최악이었던 순간을 자세하게 말할 수 없었지만, 내 얘길 아는 사람이라면 대충 짐작할 순 있었다.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던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죽음만을 답이라 생각할 때. 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약을 먹으면 잠을 잘 수 있잖아요. 그것만 해도 살만해요."
그게 내가 약을 놓지 못하는 이유였다. 그것조차 할 수 없는 것이 나였어서. 잠조차 들 수 없었던 것이, 음식조차 먹을 수 없었던 것이 나였어서. 기본적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 아무것도 되지 않았던 것이 나였어서 기본적인 것을 유지시켜 주는 약을 놓을 수 없었다. 약의 효과로 살아가는 것도 있겠지만, 약을 먹으며 나는 느끼는 것이다. '안전하다'라고.
약은, 내 마음이 쉬어가는 곳이었다.
또 다른 쉼터를 향해
지금도 나는 약을 먹는다. 잠들기 전, 빠지지 않고 약을 먹고 일어나면 또 아침에 맞는 약을 먹는다. 상비약을 항상 들고 다니며 역시 필요하면 먹는다. 약에 관한 감정은 복합적이다. 정신질환의 측면에선 '아프다'는게 눈에 보이지 않고, 내적으론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차이를 줄이기 위해 자해 같은 행동을 하지만 내겐 '약을 복용하는 것'이 그러한 행동을 대체하기도 한다. 약을 먹으면 일상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하기도 하고 언제까지 약에 의존하며 지내야 할지 막막한 것도 사실이다. 줄일 수 있다면 줄이고 싶다. 약 없이 잠드는 느낌과 일어나는 느낌을 잊은 지 오래다.
그럼에도 왜 약에 의지하는지 물어온다면, 물질은 배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의존이 비슷하다. 물질은 떠나거나 배신하지 않는다. 내가 찾는다면 늘 그 자리에 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이 괴로웠을 때, 나는 홀로 알약을 삼키고 잠에 들 수 있었다. 사람은 없어도 약은 있었다. 함께였다. 사람에게 열지 못한 마음을 약에게 열어버린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힘든 시간을 함께 보낸 약에게 마음을 활짝 열고 혼자도 괜찮다며 약을 끊어내지 못하는 게 지금의 나의 모습이라면. 그게 진짜라면 나에겐 또 다른 쉼터가 필요하다. 마음을 활짝 열 수 있는 새로운 관계가, 건강한 관계가, 최악으로 돌아가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 또 다른 쉼터. 약이 아닌 마음을 열 수 있는 관계.
실은, 상처받은 마음이 모여 약을 찾았던 것은 아닐까.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약을 먹은 것은 아닐까.
ps. 오랜만에 줄글이 쓰고 싶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