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0일, 세계 자살예방의 날.
아이러니하게 나의 첫 봉사활동은 자살한 무연고자 분의 장례를 돕는 일이었다.
어느 순간인지 모르겠다. 사는 것이 과분하다고 느껴졌다. 나는 나를, 내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 사람들은 왜인지 나를 무척이나 아껴주었다. 사랑받아도 충분한 사람이라 말해주었다. 곁에 있어주었고 때로는 찾아왔다. 과분했다. 스스로도 소중하지 않은 내겐, 모든 게 과분했다.
마음이 이렇게 고여있다면 썩을 것만 같았다. 넘쳐흐르는 이 마음을 어디론가 흘려보내고 싶었다. 그래야 내가 받는 마음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썩히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봉사활동을 알아보았다. 모르는 사람에게라도 냅다 흘려보내고 싶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마음이 흘러가길 바랐다.
그런 내가 선택한 봉사활동은 무연고자 분들의 장례를 치러드리는 일. 상주가 없는 무연고자 분들의 상주가 되어주는 일. 누군가는 너무 무거운 일이 아니냐고 물었다. 나를 걱정하기도 했다. 안 그래도 우울한데, 그런 일을 하면 더 우울해지지 않겠냐고. 그런데 그 일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마음이 쓰이고 넘어갈 수 없었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 그게 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번 해 보고,
그 뒤에 마음을 정하려고요.
어릴 때부터 우리 엄마는 말했다. 무엇이든 한 번은 해보고 그만두라고. 또 하나 덧댄 말이 있다. 기쁠 때는 못 가도 슬플 때는 함께해야 한다고. 그 말이 크게 와닿았던 건, 마음이 멀던 엄마가 장례식장에 들어오며 했던 말이기 때문이었다. 가까웠던 지인의 어머님의 장례식장에.
그래서 나는 해보기로 했고, 슬플 때를 함께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봉사 첫날부터 자살자 분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자살예방의 날이라는 건 뒤늦게 알아챘다.
고인의 삶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슬아슬하게 연락된 지인분 덕이었다. 옷을 차려입을 시간조차 없이 빈소에 온 지인분은 고인에 관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들려주셨다. 의지할 곳 없이 살아왔다는 것. 정신적 아픔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 도움조차 쉽게 받지 못했다는 것. 나는 대답조차 잊고 고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듣고 또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작 상주를 맡게 된 것은 또 다른 무연고자 분이었다. 내가 삶을 들을 수 있었던 분은 지인이 오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상주 또한 그 지인분이 맡았기에 나는 합동으로 치러진 다른 분의 상주를 맡게 되었다. 고인에 관한 성함과 간략한 주거지. 내가 처음 상주를 맡은 분의 이야기의 끝이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면, 그분의 삶마저 알 수 없는 장례식이었다.
몇 번이고 묵념을 했다. 그분의 성함을 기억하기로 했다.
봉사를 진행하는 분은 어떻게 이 일을 하게 되었냐고 물었다.
나는 겨우 '마음이 쓰여서요.'라고밖에 하지 못했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나는 오늘이 세계 자살예방의 날인 걸 알게 됐다. 이전에 방문한 복지관에서도 얘기를 들었고, 심지어 이 날 강연 의뢰까지 들어왔었는데도 잊어버렸다. SNS를 봐도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알 수 없었다. 피드에는 평소와 같은 일상이 올라왔고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갔다.
내 마음속에는 왜 떠났는지도 알지 못한 한 분과 자살로 세상을 등진 고인이 있었다.
마음을 흘려보내야 했다.
나는 다음 봉사 예약을 신청했다. 이번으로 끝내지 않고 이 일을 이어나가 보자고 생각했다. 과분한 마음에서 시작한 일인데, 봉사를 하고 나니 마음이 더 과분해졌다. 나와 같은 사람이 고인의 상주를 달고 명복을 빌어주어도 괜찮은 것인지. 이렇게 내 마음을 쓰는 것도 과분한 일인 것은 아닐지. 행여 고인을 위한 마음이 경험의 일부로 비치지 않을지.
하지만 누군가 해야 한다면,
그게 나라도 괜찮다면,
나는 계속해보자고 생각했다.
내가 받은 마음은, 하루이틀 봉사를 한다고 흘려보낼 수 있는 마음이 아니다. 삼십은 살았으니 앞으로 삼십 년은 흘려보내야 할지도 모르고 삼십 년이 지나도 또다시 마음을 받아선 평생을 흘려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여전히 나는 내 삶이 왜 소중한지 알지 못한다. 그렇게 소중히 다루지도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는 나를 소중하게 다뤄준다. 나도 내팽개치는 것을. 나도 보기 싫은 것을.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글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살아있다. 살아서 무언가 계속 이어가고 있다.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말한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더럽게 운 없이 살았다고 얘기해도 그렇다고 할 것이다. 왜 그렇게 사냐고 말해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할 것이다.
그냥 살아있네요.
알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나는 살아있으니까.
나의 힘으로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살게 했으니까.
비록 떠나간 이의 명복을 빌어주는 봉사를 결정했지만, 나는 생각했다. 떠나가기 전에 직접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면. 대화라도, 안부라도 묻는 사이었다면. 그랬다면 이 자리가 그렇게 과분하지 않았을 텐데. 마음이라도 한 번 잡아줄 수 있었다면. 얘기라도 들어줬다면.
이 마음이 사람들이 내게 준 마음이었다.
나는 그래서 살았나 보다.
그래서 흘려보내고 싶었나 보다.
이름만 겨우 아는 이에게라도.
주변을 둘러본다. 내가 이들을 모두 사랑할 수 있을지. 막막한 감정이 들다가도 이내 깨닫는다. 나는 많은 사랑을 받았구나. 그래서 주는 마음이 서투른 거구나. 서투른 자신이 부끄러우면서 숨기고 싶지 않다. 모른다면, 앞으로 알아가면 되는 일이니까. 하루를 살아가면, 그만큼 세상은 달라지니까.
이 삶에,
당신도 같이 있으면 좋겠다.
흘러가는 내 마음을 과분할 정도로 받았으면 좋겠다.
세계 자살 예방의 날, 주변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하루였길 바랍니다.
마음이 힘드신 분은 1393 혹은 1588-9191 전화를 통해 도움을 요청하는 용기를 낼 수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