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좌 사회생활백서
우리 집 체중계는 아주 엉뚱한 곳에 있다. 손이 닿지 않는 옷장 맨 위 제일 안쪽 구석이 그 자리다. 의자를 밟지 않으면 체중계를 꺼낼 수 없다. 평상시에 체중계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다. 체중계가 그곳으로 간 것은 나의 강박이 한몫했다. 체중 강박.
떡잎부터 다르다
나의 체중 강박은 십 대부터 조짐을 보였다. 합기도 체육관을 다니던 중학교 시절, 체육관엔 전자 체중계가 떡하니 놓여있었다. 합기도 시합에 나갈 때 체중별로 체급을 나누기 때문에 체중계는 반드시 필요한 물품 중 하나였다. 나 역시 시합에 나가는 선수였기 때문에 시합 준비를 할 때엔 반드시 체중 관리를 해야 했다. 시합 날 체중을 잴 때 체급보다 몸무게가 더 나가면 탈락이었으니까. 물론 체중이 너무 적어도 문제였다. 적은 것도 탈락이긴 하지만, 어쨌든 체중이 적으면 힘이 약해질 확률이 높아진다는 게 이유였다.
합기도 선수 이 년. 나는 청소년 여성 밴터급 선수로 활약했다. 나가기만 하면 금메달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내가 어마무시하게 운동을 잘한다기보단, 내 체급의 선수가 많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어도 키는 150cm를 넘지 못했고 체중도 사십 킬로대 초반이니 나오는 선수들도 대부분 작고 말랐다. 덕분에 난 전국대회에서 금메달을 휩쓸었고 처음 시합에서 져 은메달을 받은 날, 선수 생활을 관뒀다. 진 게 분해서. 마지막 메달이었던 은메달은 집에 가져가지도 않았다.
선수 생활과 함께 나의 체중 강박도 그만둘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체중계는 쉽게 날 놓아주지 않았다. 습관이 되어버린 탓일까. 그냥 성격이 강박적인 것일까. 이십 대가 되어서도 나는 계속 체중계 위에 오르내렸다. 그냥 오르내린 게 아니라 진짜 이상해 보일만큼 오르내렸다. 정신과에서도, 가족도 모두 체중계를 이만 버려달라 할 정도로.
어서 오세요, 강박의 세계에
체중 강박의 삶은 이랬다. 아침에 일어나면 일어나자마자 화장실을 다녀온 뒤 체중계 위에 오른다. 빈 속에 내보낼 것들을 다 내보낸 몸으로. 보통 아침에 체중을 재면 하루 중 가장 낮은 체중이 나온다. 이때, 전날보다 체중이 많이 나오면 체중계에서 내려간 뒤 다시 올라간다. 혹시나 체중계가 문제일까 봐. 대충 이렇게 아침에 평균 3번 체중을 잰다. 그 평균값이 ‘아침 몸무게’이다.
그다음엔 보통 사람들은 밥을 먹을 것이다. 하지만 내겐 이 과정에서 관문이 있다. ‘아침 몸무게’가 ‘먹을 수 있는 몸무게’라면 밥을 먹고 ‘먹을 수 없는 몸무게’라면 굶는다. 보통 체중이 일정하게 나오거나 덜 나오면 밥을 먹고 체중이 더 나오면 굶는 것이다. 어떻게든 몸무게를 맞춘다. 강박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 먹을 수 있는 몸무게여서 밥을 먹으면 또 먹자마자 체중을 잰다(이제 읽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힐 것 같다). 얼마나 먹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당연히 먹었으니 체중은 는다. 나도 알고 있다. 하루동안 소화도 될 것이다. 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난 다시 체중계 위에 오르고 오른 무게수만큼 낙담한다.
정말 더 얘기해서 미안하지만, 여기서 또 문제가 생긴다. 오른 몸무게가 ‘받아들일 수 없는’ 몸무게라면 어떻게든 체중을 줄인다. 운동을 해서 땀을 빼든, 화장실에 다녀오든, 심하면 구토를 하든 체중을 덜어낸다. 그 뒤 다시 체중계에 오른다. 그리고 확인받는다. 괜찮은 몸무게라는 걸. 그럼 다시 먹고, 토하고, 먹고, 토하고, 먹고.... 이 모든 과정에 체중계가 있다. 이 정도면 왜 모두들 내게 체중계를 버리라 말하는지 이해가 될 것 같다.
그 과정을 이십 대 내내 반복했다. (앞서 말했듯) 정신과 의사도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체중에 집착하는지는 완벽히 밝혀내지 못했다. 정신과 병동에 입원해서도 강박은 여전해서 정해진 날이 아니면 체중을 잴 수 없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퇴원하면 집에 떡하니 체중계가 날 기다렸다. 나는 다시 체중계 위에 올랐다. 머리로 이건 수치에 불과하고 체중은 늘고 준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반복되는 일상을 멈출 수 없었다.
체중계는 이만 버러 줘
그래서 체중계를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놓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속을 망쳐가며, 정신을 망쳐가며 지내고 싶지 않아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체중들을 지워버리고 싶어서.
솔직히, 정말 솔직히 주변의 말대로 체중계를 버리진 못했다. 다만 체중계를 눈앞에서 치워버린 날 속으로 약속했다. 한 달 동안 체중계에 오르지 않겠다고. 어떻게든 체중을 잊어보겠다고. 나는 그 한 달을 지켜냈고 한 달 만에 체중을 쟀을 때, 체중이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을 두 눈으로 보았다. 하루에 수십 번을 확인해도, 한 달에 한 번 확인해도 체중은 별로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먹어도 ‘생각보다’ 살은 찌지 않는다는 걸.
이 매거진은 주 2~3회 연재 이후 브런치북으로 전환됩니다.
식이장애 이야기 이후 소식에 관련된 이야기 / 소식좌 사회생활 꿀팁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작가소개 : 이수연
남들보다 '덜' 먹는 사람.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더 먹어"였다. 성인이 되어 우울증과 함께 공황장애, 식이장애를 앓았으며 정신병원에 입원해서도 "더 드세요"를 가장 많이 들었다. 지금은 식이장애를 극복하고 건강한 식생활을 위해 소식좌로 살아가고 있다. <조금 우울하지만, 보통 사람입니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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