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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연 Mar 03. 2023

쓰지 못한 하루

팬딩 연재 전체 공개본


 눈을 뜬다. 온몸에 무게 추를 달아놓은 것 마냥 묵직하다. 바싹 타오르는 목을 축일 물을 찾는다. 냉장고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발이 땅에 닿다 못해 푹 빠져버리는 것 같다. 속이 쓰려온다. 찬 물을 벌컥벌컥. 아려오는 머리가 조금씩 돌아간다. 어제 무슨 얘길 했었지? 맥주 6캔의 뒷모습이 아련하다. 아아. 숙취다.


 정신이 아득하다. 어제 오간 대화들이 파편처럼 떠오른다.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술을 마셨을까. 예전에는 매일 더 많은 술을 마셨는데 이제 맥주 6캔은 ‘과음’에 해당된다. 실수였던 얘기는 없나. 부끄러운 술주정은 없었나. 다행히 맥주 6캔은 내 기억을 모두 날려 보내진 못하는 듯하다. 차라리 다 지워버렸다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역시 술은 아니야. 마음속으로 생각해 본다.


 다시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아이보리색 천장이 마주해 있다. 나는 몸은 침대에 묶인 채 머릿속으로만 오늘 해야 할 일을 떠올려본다. 머리가 굴러가는 게 느껴진다. 떼구루루. 떼굴떼굴. 이번 달 마감만 두 개. 원고를 써야 한다. 이 생각을 하자마자 속이 울렁거린다. 나올 것 없이 속을 게워낸다. 원고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니. 출근길이 십만 리 같다.

 딱히 만날 사람은 없으니 대충 씻고 화장을 한다. 이를 닦기 위해 치약을 짜는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힘없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겨우 이를 닦아보지만, 손이 떨려 칫솔이 잘 쥐어지지 않는다. 이 모든 행동을 할 때에도 머리는 어지럽다. 빙글빙글. 회전차가 된 것 같은 기분. 

 무조건 따뜻하게. 옷을 겹겹이 입는다. 대충 정리된 머리는 모자로 가리고 목도리를 칭칭. 몸이 더욱 묵직하게 느껴진다. 출근..., 해야 하나? 마음이 흔들린다. 어렵사리 씻고 옷까지 입었는데 침대는 내게 애처로운 눈빛을 보낸다. 이 모든 것을 초기화시키고 자신에게 오라고. 신발을 신으려다 침대 위에 앉는다.


“어쩌지...?”


 이대로 신발만 신고 나가 십 분즈음 가면 작업실. 그냥 좀 걷기만 해도 작업실이다. 그럼에도 침대엔 엉덩이가 딱 붙었다. 전기장판은 침대와 한 마음으로 날 유혹한다. 겨울. 밖은 춥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몸을 다시 뉘이고 이 숙취를 어떻게든 넘겨버리고 싶다. 다시 구역질이 난다. 옷을 다 껴입은 채 구역질을 참으며 털썩 눕는다. 패배인가. 숙취와의, 침대와의 패배. 두 개의 마음이 타협 없이 자기주장을 해댄다.



 “어서 원고 하러 가야지!!”

 “아... 오늘은 진짜 하루만 쉬자...”

 “마감이 얼마 안 남았다고!!”

 “내일 더 하면 되잖아...”



 두 마음 모두 지지 않으려 얘기한다. 한쪽은 열정적으로 외쳐대고 한쪽은 말끝마다 게으르다. 속에서 대화가 일어나는 동안에도 나는 누워있다. 현 상황만 봐선 게으름의 승리다. 하지만 발끝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며 몸을 일으키려는 게 느껴진다. 열정의 전세역전인가. 다시 침대에 앉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어차피 다 씻었는데 나가자.’


 결국,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연다. 게으름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듯 내 몸을 자꾸 무겁게 만든다. 걷는 게 아니라 질질 끌리듯이 작업실로 간다. 도축장에 끌려가는 가축 같다. 찬바람이 얼굴을 때리자 정신이 조금 들면서도 집의 온기가 절실해진다. 나온 것을 약간 후회했지만,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 기운을 좀만 더 내어 작업실까지 간다. 도착. 문을 열고 히터를 켠다. 온열이 앞에서 몸을 녹이며 무거운 코트를 하나둘 벗는다.


 열정의 승리. 하지만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겨우 작업실까지 왔는데 숙취의 기운은 빠질 줄 모른다.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기 위해 음식배달을 시킨다. 배달 완료까지 40분. 40분이야, 하면서 소파에 온몸을 기대 눕는다. 집보단 불편하지만, 몸을 누이기엔 나름 괜찮은 공간이다. 숨을 고르며 다시 천장을 본다. 형형색색의 천들이 이어져있다. 먼지와 함께. 패턴을 찬찬히 구경하다 눈이 아파와 눈을 잠시 감는다. 똑똑. 배달이 왔다. 그새 40분이 지났나. 어렵게 몸을 일으킨다.

 배달음식 포장을 하나둘 뜯는다. 숙취에는 역시 국물이라며 돼지국밥을 시켰다. 부추를 잔뜩 넣고 새우젓으로 간을 맞춘다. 막 나온 뜨끈뜨끈함은 아니지만 속을 타고 내려가 든든하게 채워준다. 건더기는 오히려 부담스러워 국물만 잔뜩 퍼먹는다. 아삭한 김치는 느끼함을 달래준다. 탄수화물인 밥은 3분의 1 공기 정도 먹고 식사를 마친다. 


 이제 몸을 일으켜 작업 테이블로 가서 앉...아지지 않는다. 다시 소파에 눕는다. 밥을 먹고 나니 졸음이 몰려온다. 조금만. 삼십 분만. 진짜 그만큼만 있다 일어나서 작업하자. 담요를 덮고 눈을 잠시 감는다. 회전하는 지구본을 위에서 눈을 감은 것 같다. 자전이 느껴진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들이 서서히 흐려진다. 스르륵. 스르르륵. 출근해 놓고 소파에서 잠이 든다.


 

아차! 


 다시 눈을 뜬다. 지금이 몇 시지? 시간을 알 수 없는 지하에서 휴대전화를 확인한다. 벌써 두 시간 반이 지나있다. 삼십 분이 두 시간 반이 되었다. 날은 벌써 해가 진 저녁. 이제라도 뭐라도 하자 싶은 마음이 들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천장만 멀뚱히 바라볼 뿐이다. 단 몇 걸음만 가면 작업 테이블인데. 그 몇 걸음을 걷지 못해 누워 있다. 누워만 있는데 세상이 모두 내 것 같이 느껴진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것은 낭비. 그중 인생 낭비가 가장 즐겁다. 게으름이 “역시 인생 낭비는 즐겁지...”라고 말하자 열정이 “이게 무슨 짓이야! 이제 원고 써야지!”라고 나에게 재촉한다. 조용한 작업실. 시계가 째깍 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여전히 나는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속에선 열정과 게으름이 2차 전쟁을 선포했다. 시간이 계속 흐른다. 째깍째깍. 멍하니 천장을 보다 다시 시간을 확인한다. 밤 아홉 시. 하루가 다 흘러가버렸다. 일어나서 출근하고 누워만 있었는데.


 게으름의 승리다. 시간은 게으름의 손을 들어주었다. 나는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퇴근을 준비한다. 내일은 반드시 일찍 일어나 바로 작업을 하겠다고. 오늘 못 한 작업까지 내일 다 해버릴 거라고.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지금에라도 작업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달까나. 숙취의 기운은 조금씩 몸을 빠져나갔지만 여전히 잔잔하게 내 속을 괴롭힌다. 출근했다가 밥 먹고 잠만 자다 퇴근을 준비하는 내게 동료 E 씨가 묻는다.


 “이수연 씨, 작업 안 해요?”

 “몸이 안 좋아서요.”


 숙취라는 말은 쏙 빼고 몸이 안 좋다고 말한다. 대충 틀린 말도 아니다. 머리는 어지럽고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속은 불편하고 몸살처럼 여기저기 아파오니까. “내일 좀 일찍 나올게요.”라는 말과 함께 아무런 활약도 못한 가방을 멘다. 목도리를 칭칭 감고 작업실 계단을 오르며 생각한다.


 ‘이제 다시는 술 안 마신다.’


 절대 지켜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다짐해 본다. 이놈의 술. 내가 쓰지 못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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