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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하는 스노우 May 31. 2022

고통에 대응하는 자세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은 고통이다. 부처도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기독교는 고통이란 감정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유대교 신앙도 고통에 대한 추억으로 가득하다. 삶은 곧 제약이란 등식은 피할 수 없는 실존적 진리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나약한 존재라서 신체의 쇠락을 피할 수 없고 심판과 경멸로 고통받는다.

<12가지 인생의 법칙>, p326

삶은 고통이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인간은 고통받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쉬운 문제부터 어려운 문제까지 헤쳐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 또한 쉽지 않다. 설사 주변에 있던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또 다른 고민이나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즉, 인생이란 거대한 고통의 바다다.

그러면 왜 인생은 고통일까? <초집중>의 저자 니르 이얄에 따르면, 인간은 태성적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게 만들어졌으며, 기본값(디폴트)이 불만과 불평이라고 설명한다. <일반심리학 리뷰 Review of General Psycholohy>에 실린 논문에서 "만족과 쾌락이 영원하다면 지속적으로 더 나은 편익이나 발전을 추구할 유인이 거의 없다"를 설명하면서, 만족감과 행복감은 인류에게 좋은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은 더 열심히 노력하고 발전하려 했는데 이는 끊임없이 불안해하도록 진화해온 것이며, 우리는 이 특성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래서 우리 삶에서 고통을 빼놓을 수 없다.

사소한 문제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위험한 것이나 걱정을 야기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 하루 종일 생각하는 건 현대 사회에서 큰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 생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과거의 인체 시스템이 현재에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보고 예전에 읽었던 <진화의 배신>이라는 책 제목이 생각났다. 현재 우리 상황을 적절하게 대변할 수 있는 명칭이라고 느꼈다.

그렇다면 우리 시스템은 왜 현대 사회에 맞춰서 바뀌지 않았을까? <인스타브레인>의 저자 안데르스 한센에 따르면 1만 개의 점을 우리 인류가 살아온 시간이라고 가정한다면, 자동차, 전기, 깨끗한 물, TV가 있던 시절은 8개의 점에 해당하며, 컴퓨터 및 휴대전화가 있던 시절은 3개의 점, SNS 및 인터넷이 있던 시절은 점 한 개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9천9백9십9개의 점에 해당하는 인류의 삶은 인터넷이 없었다. 즉, 기하급수적인 인류의 발전 때문에 우리 인체 시스템이 환경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고통에 대해서 대응해야 할까? 거대한 고통의 바다에서 고통에 대해서 적절하게 대응하고 관리하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고통에 잘 대응하지 못하게 된다면 인생은 더욱 힘들어진다. 나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서 인생에서 고통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해 보았다.


시련의 의미에 대해서


만약 그곳에 삶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련이 주는 의미일 것이다.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p122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오르스트리아 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신경학자이며 심리학자이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였으며, 테레지엔슈타트, 아우슈비츠, 카우퍼링과 투르크맨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 그의 책은 포로수용소에서의 경험을 기록한 내용이며, 그는 이 책을 작성하면서 존재의 의미의 중요성과 수용소에서 계속해서 살아갈 의미를 찾았다고 한다. 

수용소에서 주는 시련은 가혹했다. 아무 이유 없이 구타와 욕설을 퍼붓는 감시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좁고 열악한 생활환경, 노동착취, 턱없이 부족한 음식들, 같은 유대인들이고 같은 수감자들지만 앞잡이처럼 등 처먹는 카포들의 만행까지. 수용소에서 우울감에 빠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이 우울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살로 이어졌다고 했다. 책의 내용에서 "수용소에서 자살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라는 문장을 봤을 때, 수감자들이 경험했을 시련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자는 아픈 시련을 주는 상황에서도 인간은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모습에 놀랐다고 했다. 한 사례로 저자는 수용소 안에서 뜨거운 수프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연히 창밖을 봤는데, 방금 전 밖으로 옮겨진 시체가 동태 같은 눈을 하고 저자를 바라보고 있었다고 했다. 죽은 사람은 두 시간 전 저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아무렇지 않게 수프를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이 대목을 보면서 인간의 적응력에 놀라고, 고통에 대한 둔감화가 이루어짐에 또 놀랐다. 

뛰어난 적응력과 둔감화에도 불구하고 시련은 늘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저자는 시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저자는 시련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서 의미 부여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했다. 고통에 대해서 깊은 의미 부여를 해서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와 반대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선택할 권한은 본인에게 있으며,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도 본인에게 있다고 설명한다. 즉, 시련에게 가치를 부여할 것인가, 부질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릴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도 수용소 안에서 시련에 대해 고민하고, 의미 부여하는 사람들이 극소수였다고 설명한다. 손실회피 성향이 강하고, 부정적인 것에 집중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인간에게는 참 쉽지 않은 사고방식인듯싶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에는 동의한다. 저자는 시련에 대해 사고하는 방식이 수용소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은 운명과 시련을 통해 무엇인가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시련과 고통을 경험하고 이겨낸 사람들은 큰 성장을 이뤄낸 경우가 많다. 경기에서 패배하면 자신 혹은 팀에게 부족한 부분을 공부해서 발전하고, 연인과 헤어지게 되면 자신에게 무엇이 문제였는지 고민해 보면서 성장하게 된다. 즉, 우리는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성장하고 발전한다.


해방(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만 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저녁이 되어 사람들이 모두 막사에 모였을 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은밀하게 물었다.
"말해 보게. 자네 오늘 기뻤나?"
우리 모두 똑같은 느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 사람이 부끄러운 듯이 대답했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아니야."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p154

어느 때와 다름없이 지옥 같은 수용소 생활을 이어가던 참에 갑자기 감시자들이 사복을 입고 담배를 권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수용소 안에는 텅텅 비어있고, 바쁘게 펄럭이는 항복 깃발을 보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미친 듯이 행복한 기분일까? 긴 기다림 끝에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저자는 수용소에서 해방된 후, 후유증을 겪었던 이야기들을 책에 담았다. 정작 자유를 얻었지만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환멸 현상을 겪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를 극복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했다. 수용소에서 자신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견딜 수 있는 힘을 준 존재가 실제로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충격은 가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산 넘어 산이라는 표현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이렇듯 자유를 얻거나 원하는 것을 얻었지만 다시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현대 사회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에 피트니스 사업을 운영하는 A형과 밥을 먹은 적이 있다. 현재 월 2~3천만 원을 벌고 있어서 경제적인 자유를 어느 정도 이룬 형이다. 나는 A형이 부러웠고, 그 형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대화를 해보았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라서 당황스러웠다. A형은 월 5천만 원이 목표라서 여전히 열심히 노력하고 있고, 사업에 있어서 다양한 변수에 대응하느라 고통스럽다고 했다. 그래서 대화의 내용이 거의 대부분 A형의 고통 스토리가 되었다. 뭔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제적인 자유를 이루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여전히 A형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고통을 이겨내는 중이었다.

최근에 내가 좋아하는 재테크 유튜버 김짠부님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짠부님은 20대에 1억을 마련했고, 내 집 마련을 했으며, 프리랜서로서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존재다. 하지만 짠부님은 번아웃이 왔고, 인생에 대해서 힘듦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분명 남들이 보기에 좋은 결과물들을 얻어냈지만 정작 본인은 힘들어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유튜버이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드는 한편, 의아하기도 했다. 원하는 것을 얻었지만 행복하기만 하지 않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통에 대응하는 자세

과연 이 모든 시련, 옆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이런 상황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 왜냐하면 만약 그렇지 않다면 궁극적으로 살아남아야 할 의미가 없기 때문에. 탈출하느냐 마느냐와 같은 우연에 의해 그 의미가 좌우되는 삶이라면 그것은 전혀 살아갈 가치가 없는 삶이기 때문에.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p190

저자에 따르면, 사람은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나 혹은 자기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거스를 수 없는 것이 바로 시련의 불가피성이라고 한다. 이런 시련에 대해서 받아들이고 용감하게 도전하게 된다면 삶은 마지막까지 의미를 갖게 되며, 그 의미는 마지막까지 보존된다고 설명한다. 즉, 삶의 의미가 절대적인 존재로 바뀌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 있어서 고통에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죽음의 수용소라고 불리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선조들이 일제의 탄압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고통을 견뎌내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은 고통에서 완전히 헤어 나올 수 없지만, 이를 적절히 대응하는 것을 통해서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모두 각자의 고민이 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든, 외모가 잘생겼든, 멋진 몸을 가졌든 모두 예외 없이 고유의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그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문제 해결 과정에 있어서 의미를 부여하고, 그 문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에서 고통에 조금 더 유연하게 대처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어떠한 고민에도 유연한 대처가 있다면 공포에 대한 무서움은 줄어들 것이다.




[이 글의 TMI]

1. 인생은 고통이지만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함. 아 물론 수용소는 좀,,,

2. 일제에 앞잡이가 있다면, 나치에는 카포가 있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됐음. 역시 어딜 가든 배신하는 놈들이 있구나

3. 본인만의 고통을 대처하는 팁이 있다면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저는 인생의 지혜가 부족해 항상 고통받습니다,,,

4. 이번 주 토요일 새로운 독서모임에 나가는데 떨린다.

5. 내일은 중앙도서관에 가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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