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광고주님들의 활약상 (2)
45. 광고주님들의 활약상 (2)
낯뜨거웠다. 내가 그 정도였는데 그분은 어땠을까.
다니던 회사 내에 디자인 팀(3명)이 따로 있어서 영상 내에 들어가는 자막 디자인을 따로 맡기던 시절이 있었다. 뭐 영상 디자인이라고 해서 특별할 건 없지만 그 한 분에겐 내가 입사함으로써 '영상 디자인' 업무가 추가된 것이다. 회사에 다닌 지 오래된 분이고 연차도 꽤 높던 웹디자이너라 기대도 조금 있었다.
이번에도 대기업의 제품 영상을 의뢰받아 촬영을 마친 후(광고주가 촬영 현장에 참여함) 가편집본을 디자이너에게 넘겼다. 며칠 후 나에게 넘어온 자막 디자인은 솔직히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막 이상한 정도는 아니었는데 막 퀄리티가 높아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내부에서 통과된 거라 영상에 얹혀서 광고주에게 보냈는데.. 적나라한 피드백이 오고야 말았다. 첫 문장부터 팩폭이었다.
"안녕하세요. 일단 디자인이 너무 촌스러워요.(중략)"
메일을 보자마자 '억'이라고 소리 내는 바람에 무슨 일이냐며 팀장님과 디자이너가 내 자리로 오게 됐다. 그쪽 담당자는 화가 많이 난 건지 원래 말투가 그런 건지 읽는 내내 낯이 뜨거웠다. 내가 이렇게 낯이 뜨거운데 내 옆에 서 계신 이 분은 어쩌지. 내용은 대략 '색이 이상하다', '촌스럽다', '별로다', '왜 넣은 거냐', '빼라' 등으로 집약할 수 있는데 어떤 부분을 바꿔달라는 요청보다는 화가 많이 나셔서 자존감 박살내기에 초점을 맞추신 듯했다. 조용히 자리로 돌아간 디자이너는 조용하게 수정에 들어갔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수정 메일은 항상 저녁 8시에 왔고 나와 팀장님, 디자이너는 저녁 8시만 되면 단톡에 수정 내용을 공유하고 다음 날 어떻게 수정할 건지 방향을 잡았다. 어쩔 수 없었다. 대기업이고 중요한 광고주였기에. 저녁 8시 대기조라도 빠르게 빠르게 수정사항을 반영하여 그분들을 달래 드려야 했다. 나중엔 디자인뿐만 아니라 미리 고지받지 못한 부분까지 CG로 처리해달란 요청도 받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수정에 들어갔다.
이런 일이 있을 때면 늘 생각하는 게 있었다.
'나도 그 브랜드의 고객이었다.'
앞으로도 고객일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