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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고운 Aug 29. 2021

좋아하는 용기의 나비효과

나의 문구 여행기-문경연

 커가면서 수집 욕구는 자연스레 사라졌는데, 어린 시절엔 몇 가지 물건을 모으는데 한창 빠져 있었다. 그중 하나가 문구류였고, 나는 샤프연필과 노트를 디자인별로 수십 개씩 구매했다. 샤프의 경우 선호하는 형태가 다양했는데, 기본적인 자바 제도 샤프부터 연필이나 주사기 모양의 샤프, 귀여운 캐릭터나 하트 모양이 달려 있어 쓸 때마다 딱딱 소리가 났던 샤프까지, 수십 자루가 몇 개의 필통에 가득 담겨 있었다. 노트는 동일한 형태의 기본적이고 얇은 줄 노트를 선호했다. 대신 표지 디자인이 나의 구매 기준이 되었다. 주로 파스텔 톤의 배경을 선호했고, 복잡한 그림보단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깔끔한 단색이거나 자연 혹은 작은 캐릭터가 그려진 표지 위주로 골랐다. 어쩌면 문구류에 먼저 관심을 보인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초등학교 입학 후, 우리가 가장 많이 드나드는 곳은 떡볶이 가게도 아닌, 문방구이기 때문이다.


 문경연 작가 역시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와 함께 갔던 문구점을 시작으로 문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문구를 사랑하는 중이다. 디자인을 전공한 그녀는 대학 졸업 후 67일 간 유럽과 미국을 여행했다. 오로지 여러 나라의 문구를 접해보기 위해서 말이다. 작가는 각 나라의 도시에 있는 여러 문방구를 방문하면서 그곳만이 가진 매력과 특색을 발견했다. 유럽의 문구점이 주인과 소비자에게 수고로움을 요구하는 대신 아날로그적 감성을 선사했다면, 미국 뉴욕은 원하는 문구를 쉽고 편하게 찾을 수 있었지만 긴 여운을 남기지 않았다. 이 과정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어떤 스타일의 문구를 더 선호하는지 알게 되었다. 챕터마다 직접 구매한 노트, 마스킹 테이프, 클립, 펜 등이 조화롭게 찍힌 사진이 나와 있는데, 보면서 나의 가라앉은 학용품 수집 욕구가 되살아남을 느꼈다.


 비교적 편하고 가볍게 읽었던 에세이지만, 남긴 메시지는 내게 긴 잔상을 남겼다. 책 표지 가운데엔 작은 글씨로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용기에 대하여'라고 써져 있는데, 이 문장의 결론이 책 속에 충분히 담겨 있다. 문경연 작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어디까지 좋아할 수 있는지 알기 위해 불안감과 설렘을 동시에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여행 중에도 틈틈이 불안감이 찾아왔지만, 그녀는 글을 쓰며 끊임없이 자신과 대화했다. 결국 여행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온 작가는 취업 준비 대신, 자신의 취향이 한껏 깃든 문구들을 직접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얼마 후, 그녀는 '아날로그 키퍼'라는 문구점의 사장이 되었다. 초반엔 SNS를 통해 소량으로 판매를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고, 이는 오프라인에서도 구매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는 이곳을 찾는 손님들이 많아진 덕분에, 좋아하는 분야 연구에 더욱 힘쓰고 있다.


 '나의 문구 여행기'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나비효과'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나비효과의 필수 요소는 자신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는 '용기'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과감히 뛰어들었고, 결국 심리적, 경제적 여유를 모두 이룰 수 있었다. 만약 졸업 후 문구 여행이 아닌, 남들처럼 취업 준비에만 몰두하기를 선택했다면, 아날로그 키퍼의 CEO와 한 권의 책을 내는 작가가 될 수 있었을까. 그녀의 용기가 문구 사랑을 확고히 했고 그것이 열정을 불러일으키자, 작지만 여러 노력으로 인해 자신만의 훌륭한 성과를 만들었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사회가 형성한 보편성이란 틀에 잘 맞아 굳이 색다른 일에 뛰어들지 않아도 만족하며 살 수 있다. 하지만 그 틀에 전혀 맞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오히려 이들은 자신만의 새로운 틀을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 사는 것이 훨씬 행복할 수 있다.


 나에게 솔직한 것이 가장 어렵고 무섭다.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이 나라서. 내 앞에서 솔직해지면 꼭 아프다.

 -p. 93


 오스카가 부싯돌로 불꽃을 만들어 종이에 불을 옮겨 담을 때 다영 언니가 물었다.

 "라이터나 성냥이 있는데 왜 부싯돌을 써?"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답했다.

 "그냥 이게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야."

-p. 95


 나는 모르는 것을 새로이 아는 것보다 알던 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이 더 어렵다고 생각한다.

-p. 261


<T.M.I>

 책을 다 읽어갈 때쯤 '아날로그 키퍼'를 인스타에 검색해 봤다, 놀랍게도 이미 내가 팔로우한 계정이었다. 이전에 디자인이 예뻐서 '좋아요'를 눌렀던 기억이 있는데, 그게 작가님이 운영하시는 곳이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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