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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고운 Sep 05. 2021

잠 못 이루는 밤의 무게를 덜어내고 싶다면

문보영 시인의 일기시대

(이번 서평은 퇴사 전, 작가의 서랍에 간직해두었던 글을 조금 다듬어 올렸습니다. 오늘도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일기를 잘 쓰지 않는다. 어릴 적 방학숙제로 해갔던, 대체로 '재미있었다'로 마침표를 찍으며 해피엔딩을 맞이했던 일기장이 내 생애 일기에 임했던 가장 성실한 태도였, 한때 친구들과 교환일기를 쓰며 나 혼자만 간직하는 일기가 아닌, 공개성 일기 끄적이던 게 다였다. 그런데  아이에서 어른 아이가 된 후부 일상을 글로 담아내기가 더욱 힘들어진 걸까. 잉여롭게 보내던 그 시절보다 바빠졌지만 훨씬 단조롭고 권태로워진 일상 탓인 걸까. 아니면 그 단조롭고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 웃음 짓는 순간보다 찡그리는 순간이 더 많아 이를 또다시 반추해내고 싶지 않아서일까. 아니, 사실은 어른인 척하며 늘어놓은 앞의 두 이유보단 부지런하지 않아서가 가장 겠지.


 만약 내가 그동안 자기 전에 생각했던 모든 몽상과 깊은 사유와 여러 흑역사를 필터링 없이 모조리 일기장에 적었다면, 작은 서재 하나 정도는 빽빽이 채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나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눕는 순간, 약풍으로 틀어져 있던 선풍기를 강풍으로 바꿔 튼 것처럼 뇌가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밤마다 공상과 사색이 버무려지며 내 머릿속을 오간다. 특히나 요일의 마지막, 일요일 밤이 되면 그 증상은 더욱 심해진다. 항상 열린 결말로 끝이 나는 생각의 무한궤도는 월요병을 더 심하게 나타나게 할 뿐인데도. 사유가 깊어지니 시간 쏜살같다. 난 분명 11시에 누웠는데 휴대폰 액정 화면 01:00이 떠 있다. 빨리 자야 내일을 어찌어찌 또 흘려보낼 텐데.


 그런데 최근 타인의 일기장을 구경하게 되면서, 잠 못 이루는 밤의 무게를 조금 덜어낼 수 있었다. 한 시인이 쓴 일기장. 주로 새벽 5시가 넘어서야 잠이 드는 문보영 시인은 '일기시대'라는 제목을 가진 자신의 일기장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 안엔 새벽을 보내는 자신만의 노하우가 담겨 있기도 하고 꿈에 대한 내용이 세세하게 등장하기도 하며, 때론 어둠이 몰려오면 생각날 수밖에 없는 과거의 기억을 조심스레 꺼내 놓기도 한다. 그녀의 솔직한 일기를 읽다 보면 어느새 노곤함이 몰려온다. 일말의  인간 그 자체로 느껴져서.


 문보영 시인이 고백한 이야기들 중 다수가 내 마음을 뜨끔하게 했다. 그중 하나인 '내 독서의 이유는 무언가를 미루기 위해서일 때가 많다(p. 24)'던 그녀의 문장을 고, 꼭 해야 할 일을 기한 직전까지 회피하며 책으로 현실 도피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주위에선 책을 많이 읽는 나를 보고 존경의 눈빛을 보내지만(기분 탓일 수도 있다) 이런 짓을 할 때마다 내가 건강한 독서 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다. 책을 '건전한 핑곗거리'로 생각하지 않도록, 독서는 플래너의 1번 자리에서 무조건 배제해야겠다.


 '일기 시대'는 그림일기다. 문보영 시인은 많은 새벽을 자신의 방 안에서 보낸다. 일기장엔 그 방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그날의 감정에 따라 안의 구조를 조금씩 다르게 그려 넣었다. 글을 읽다 보면 작가가 방 안의 이곳저곳을 누비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림을 보며 그녀의 동선을 따라가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괜스레 나도 내 방 구조를 머릿속에서나마 그려보게 된다. 시인의 귀여운 그림 실력을 보여주는(비꼬는 거 절대 아니다, 귀엽다=귀엽다) 것엔 방 구조 말고도 그녀의 상상 속 친구인 뇌이쉬르마른과 눈물 모양의 텐트, 꿈속 이야기가 있다.


  그녀의 일기엔 엉뚱하고 재미있는 문장들이 많은데, 신기하게도 그 속엔 다수가 공감하는 가볍지만은 않은 이야기가 잘 보이게 담겨 있다. 시적인 문장 속엔 그동안 그녀가 고민에 대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민했을지 알 수 있는 지혜로운 해결책이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고민은 나의 고민과 굉장히 닮아 있다. 덕분에 며칠 밤을 그걸로 끙끙 앓던 나는 마음 편히 침대에 몸을 던질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이 반복되니, 갑자기 일기가 쓰고 싶어 졌다. 실제로 지나간 일기란 제목을 붙이고 몇 줄 끄적였다. 버석한 마음이 조금 축축해졌다. 정말 일기시대가 도래할 것 같다.


 일기장이 책으로 나오게 되어 기쁘다. 왠지 정당하게 훔쳐보는 기분이 든다. 어쩌면 오랜 시간 함께하는 것보다 일기장을 보여주는 것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문보영 시인의 일기는 참 재미있었다.




"일기는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선한 면을 가지고 있어서 누군가의 일기를 읽으면 그 사람을 완전히 미워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p. 12


 "황구는 두 번 접어야 하는 접이식 우산을 좋아하지 않았다. 우산을 접을 때, 세상을 내쪽으로 끌어당기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황구는 손 힘이 약했기 때문에 세상을 자기 쪽으로 향하게 하는 게 쉽지 않았다."

 -p. 59~60


 "내 영혼은 쫙 펼치면 줄줄이 손을 잡고 있는 접힌 종이 인형처럼 생긴 것 같다."

-p.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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