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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고운 Jan 21. 2022

회사 밖 먹고사니즘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서메리

짧지도, 길지도 않았던 나의 직장생활을 돌이켜보면, 일보다 일 외적인 것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순간이 많았다. 조금 늦게 출근한 날이면 마주치는 상사와 어색하게 엘리베이터를 동승할 때, 커피 심부름을 받을 때, 점심시간에 아직 먹고 있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기다리는 상황이 싫어 급체할 정도로 밥을 욱여넣을 때, 직원들의 끊임없는 험담에 가담하지는 않지만 모른 척하는 것을 최선으로 여겨야 할 때, 마음에도 없는 좋은 말을 해야 할 때, 주말에도 울리는 단톡방 카톡 알림에 답장해야 할 때 등...... 누군가는 '겨우 이런 걸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겐 일의 능률을 떨어뜨릴 만큼 피로감을 유발했다.


직업 특성상 야근은 없었지만 직장에서 이미 체력이 방전되다 보니 퇴근 후엔 활동적인 취미를 전혀 할 수 없었다. 신입 시절 종종 하던 요리보다 배달 횟수가 늘었고, 체력을 길러보자고 신청했던 필라테스와 요가는 코로나가 터지면서 발길이 뜸해졌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매일 하던 취미가 있었다. 아니, 이럴 때일수록 더 기대게 되는 취미가 있었다.


나는 매일 책을 읽었고 자주 브런치에 글을 올렸다. 그렇게 조금씩 나의 진짜 흥미를 알아가던 중, 3년 차에 생각지도 못한 부서에 추가로 배정받으면서 피로도는 더욱 심해졌다. 선택권 없는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프리랜서 삶을 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결국 고민 끝에 사직서를 제출했고, 백수 6개월 동안의 자아탐색 끝에 찾은 '북 컨설턴트'란 꿈을 이루기 위해 갭 이어를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난 직장인일 때보다 불안하지 않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지금 소개할 책이 나와 너무도 비슷한 결을 담고 있다 보니 반가운 마음에 서두가 너무 길어져 버렸다. 급하신 분들은 지금 문단부터 읽어주시길 바란다. 서메리 작가는 현재 출판 번역가이자 작가로 활동 중인 프리랜서이다. 하지만 그녀의 전 직장은 이와는 전혀 관련 없는 분야인 로펌 사무직이었다. 대형 로펌에서 5년 간 직장생활을 하며 작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은 회사 체질이 아니라는 것을. 결국 '회사 밖에서 먹고사는 사람이 되자'는 목표를 가지고 몇 가지 준비 끝에 소심한 퇴사를 결정하게 된다.


작가는 마이너스 통장과 신용카드 유효기간을 늘리는 등의 경제적인 준비는 철저히 해두었지만 몇 가지 준비에는 가장 중요한 '뭐해 먹고살지?'가 없었다. 영문학과를 졸업해 누구나 대체할 수 있는 사무직 경력이 전부였던 그녀는 프리랜서로 먹고 살 기술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취미를 모두 나열한 목록을 만들었다.

놀랍게도 거기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혼자서 하는 일'이라는 것. 이를 통해 자신이 회사 밖 체질이라는 것을 확신했고, 자신의 전공과 가장 관련 있어 보이는 출판 번역가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하지만 영문학 전공이 번역가를 준비하는 과정에 전혀 메리트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는 그 여정을 모두 담고 있는 자기 계발서이다. 1년 간의 번역 출판사 준비 과정, 쉽지 않은 첫 일감 따기, 일의 비수기와 성수기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방법, 프리랜서의 장단점과 사람들이 가지는 선입견으로 겪는 그들의 고충, 회사 밖에서 먹고살기로 결정했다면 퇴사하기 전 체크해야 할 7가지 리스트까지 서메리 작가는 실제 경험담을 토대로 우리 같은 프리랜서 꿈나무들에게 유용한 꿀팁들을 전달한다. 오히려 멘땅에 헤딩하듯 도전한 덕분에 선뜻 새로운 분야의 길을 선택하지 못하는 이들에서 큰 용기를 줄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한 번도 멈추지 않은 것. 나는 단 한 번이라도 멈춰 서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자세히 관찰했어야 했다.


가장 마음을 울렸던 문장이다. 왜 우리 삶엔 브레이크가 쉽게 작동되지 않는 걸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 그저 남들이 많이 가는 길을 계속 가다 보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 작은 상처에도 아파할 게 분명한데. 나 또한 이 사실을 얼마 전에 깨달았고, 이젠 확신한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 새로운 갈림길에 들어서도, 혹은 가는 길에 나타난 좁은 길을 선택해도 지금 시대엔 충분히 먹고살 수 있다는 걸. 지금은 재능보다 용기 있는 사람이 성공하기 쉬운 세상이다.


나는 번역 출판사를 목표로 하고 있진 않지만, 건너뛸 장이 없을 정도로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북 컨설턴트'를 직업으로 삼기 위해 어떤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지 같은 실질적인 도움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한 작가답게 중간중간 귀여운 삽화가 들어가 있어서 글의 재미와 가독성을 높여 준다. 참고로 이 책은 이 브런치에서 연재하던 작품이다. 구매하기 전에 참고하고 싶다면 서메리 작가의 브런치를 검색하기 바란다. 인스타그램에서도 활동 중인데 주로 카툰을 연재 중이다.


현재 그녀는 총 6개의 직업을 가진 N잡러이다. 책에서 보여지듯 작가, 번역가, 일러스트레이터, 1인 출판사 대표로 프리랜서의 기반을 다져나갔고 최근엔 유튜브와 클래스 101에 출연하며 유튜버와 강사로도 활동 중이다. 이렇게 원하는 분야를 선택하고도 잘 먹고 잘 사는 이들이 늘어나 정말 회사 체질인 사람들만 회사에 남게 된다면, 취업문이 지금보단 넓어질 것이고 이로 인해 과도한 학구열도 줄어들 것이다. 하루빨리 이런 윈-윈 구조의 사회가 도래하길 바란다.




p. 17

겉으로는 담담한 척, 잘 지내는 척해도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나도 모르게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짜증을 냈다. 정작 나를 힘들게 한 사람들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하고, 괜히 소중한 내 사람들에게만 화풀이를 해댔다.


p. 36

그때의 나는 취업을 갈망하는 대부분의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취향이니, 적성이니 하는 배부른 소리를 할 여력이 없었다. 우리는 '어떤 일을 잘하는가?', '어떤 일을 좋아하는가?'라는 질문보다 '지금 내 스펙으로 어느 회사, 어느 분야에 지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더 진지하게 고민하라고 배웠다.


p. 132-133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 경험을 통해 내가 얻게 된 가장 큰 자산은 프리랜서의 도전 범위가 무한히 넓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 전까지의 나는 '일단 번역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블로그 운영을 포함한 모든 노력의 초점을 그쪽으로만 맞추고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직장인 시절을 쭉 거치며 몸에 밴, 한 방향만 바라보고 달리는 습관을 아직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p. 220

하지만 내가 가진 생각과 정보들을 조심스레 공유하는 동안, 나는 이 세상에 경력이 부족한 사람이 더 잘 답해 줄 수 있는 질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 227

소위 '사회생활'에 자신이 없는 프리랜서 지망생들에게 지금 이 시대는 그야말로 기회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프리랜서를 꿈꾸면서도 영업에 자신이 없다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거의 호소에 가까운 조언을 한다. 제발 지금 생각한 것들을 인터넷에 올려 보라고. 망해도 좋고, 인기가 없어도 좋으니 딱 한 번만 해 보라고. 어차피 밑져야 본전 아니냐고.


p. 285

단호히 말하건대, 체질은 잘못이 아니다.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에게 너는 어째서 복숭아를 만지면 두드러기가 나느냐고 따져 물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만약 그가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복숭아 과수원에서 일해야 한다면 당연히 남들보다 훨씬 힘이 들고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그의 잘못이 아니며, 성격이나 능력이나 인내심의 문제라고 볼 수도 없다. 개인의 체질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복숭아 과수원에서 일하는 방법밖에 가르쳐 주지 않는 우리의 답답한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p. 290

"10개월 뒤는 불안하지만, 10년 뒤는 불안하지 않습니다."

(......) 이 대답은 어떻게 보면 직장에 다니던 때와 정반대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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