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콜센터 상담원이 통화 중 고객의 계속되는 폭언으로 실신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범인은 무려 200통이 넘도록 콜센터에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별 미친놈이 다 있네"하고 혀를 끌끌 찼는데,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아주 가끔 일어나는 경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얼마 전 유퀴즈에서 114 상담사분의 인터뷰 내용을 듣고 내가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래엔 수많은 댓글이 달렸는데, 상위 댓글의 대부분은 다른 분야의 콜센터에서 일하는 상담원들의 씁쓸한 경험담이 차지하고 있었다. 목소리만 들린다고 상담사들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드는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에게 엄중한 처벌을 가했으면 좋겠다.
이런 기억들이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건지,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대출 도서에 넣었다. 읽으면서 화가 날 걸 각오했음에도, 넘길 때마다 종잇장에 욕을 퍼부었다. <콜센터 상담원, 주운 씨>는 통화기 너머에 있는 수많은 가해자들 뿐 아니라, 상담원들의 근무 환경을 더욱 열악하게 만드는 기업의 운영 체계를 비판한다. 박주운 작가는 입사한 후부터 계속 퇴사를 꿈꿨지만 5년의 기간을 채우고 나서야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나였다면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나왔을 텐데, 어떻게 5년을 버텨낸 걸까. 누군가는 미련한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역시 그에게도 사정이 있었다.
원래 3개월 정도만 할 생각이었다. 몇 곳의 직장에서 퇴사 후 재취업 준비 기간 동안 필요한 돈을 마련할 용도로. 하지만 그동안 다녔던 직장에서의 경험으로 인간관계에 예민한 자신의 성향을 알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직원들 간의 접촉이 적은 콜 센터 업무를 계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5년간 일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기력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퇴근을 하고 집에 오면 마음이 텅 빈 듯 헛헛하다. 감정 조절이 몸에 배서 사람을 만나는 것도 감정을 쏟는 일처럼 느껴진다. 점점 무기력해지고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에 노력하고 싶지 않다. 그러다 보면 진짜 병을 얻기도 한다.
새로운 업무를 배울 때 계속 짜증을 내던 상사가 있었다. 긴장 상태에 있던 나는 더욱 위축되었고 질문을 두려워하게 되면서 실수가 잦아졌다. 매일 고성이 오가니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그럴수록 퇴근 후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는데 온종일 물속에 가라앉은 느낌 때문에 한 시간 이상 집중할 수 없었다.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 너무나 잘 안다.
얼마나 많은 진상고객들을 만났던 건지 그는 2장에서 진상 보고서를 따로 만들어 보여주었다. 거기엔 욕설뿐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상담원들을 괴롭히는 존재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오히려 욕하는 사람들보다 차가운 어투, 성희롱적인 발언, 본인이 잘못해 놓고 억지 보상을 요구하거나 상대방을 까내리면서 자신을 추켜세우는 종족들에게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다. 기업은 이런 고객 같지 않은 고객들로부터 직원들을 보호해야 하는데, 오히려 시끄러워지는 상황을 피하기에만 급급하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 걸까. 우선 기업에서 악성 고객을 대하는 태도가 잘못됐다. 콜센터는 일이 커져서 본사로 넘어가지 않기를 바라고, 본사는 콜센터 내에서 조용히 처리되길 원한다. 최대한 상담원이 진상을 막아내다가 도저히 감당 안 되는 고객을 만나면 본사나 콜센터에서 대충 원하는 바를 들어주고 끝내버린다. 비상식적인 고객과 싸우며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것보다, 적은 금액으로 보상을 하고 조용히 시키는 편이 낫다는 생각에서다. 이런 대응은 잠재적인 진상을 더 키울 뿐이다.
이런 상황은 비단 콜센터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닐 것이 아니다. 기업들은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해결하기보다 상부에 보고되지 않도록 쉬쉬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기업들이 회피할수록 말단 직원들만 힘들어지는 구조다. 진상들이 늘어나니 상담원들의 마음의 상처는 깊어만 간다.
저자가 콜센터에서 겪었던 상황들은 다른 모든 서비스 직원들의 마음을 대변해주기도 한다. 특히나 대면으로 고객들과 소통해야 하는 직원들은 언어폭력 말고도 물리적인 폭력에 노출될 수 있다. 한 달 전쯤 처리해야 할 서류가 있어 공공기관 두 곳을 들른 적이 있다. 내 오해일 수도 있지만 두 담당 직원 모두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당시엔 솔직히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하지만 이젠 조금 이해가 된다. 당일 몇 명의 진상 고객이 다녀간 걸까.
콜센터의 또 다른 충격적인 모습 중 하나는 상담사들에게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마저 제대로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상사에게 허락을 받고 나서야 화장실을 갈 수 있다. 혹여 관리자가 자리를 비울 경우엔 답장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배만 부여잡을 수밖에 없다. 전화 응답률을 높이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회사 덕분에 직원들은 허락을 받고 나서도 10분 내로 자리에 돌아올 것을 강요받았다. 점심시간도 마음 편히 이용할 수 없었다. 넓은 텀을 두고 교대로 식사하기 때문에 매번 들쭉날쭉한 점심시간으로 자주 소화불량에 시달려야 했고 정해진 시간 몇 분 전에 전화가 오면 통화시간이 길어질까 봐 조마조마했다. 매일매일 긴장의 연속이었다.
작가는 콜센터의 어두운 민낯만 보여준 것 같아 염려가 되었던 건지 그 외의 경험담도 늘어놓는다. 가장 유용했던 건 콜센터 이용 팁이었다. 콜센터에 대한 불만사항 중 하나가 통화를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건데, 그는 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한 방법을 소개한다. 중반부엔 피식 웃음이 나오는 재밌는 상담 에피소드들이 등장한다. 여러 번 읽으면서 그전까지 붉으락푸르락했던 얼굴의 열기를 식히기 바란다.
이제 그는 이곳을 떠나 새로운 삶을 스케치하는 중이다. 부디 끔찍했던 5년의 기억이 흐려질 만큼 벅찬 일상을 보내기 바란다.
p. 34
사무실환경은 그야말로 미세먼지가 가득하다고 보면 된다. 그 안에서 끊이지 않는 콜을 받으면 금세 목이 건조해져 따갑다. 최소한의 프라이버시를 보장받지 못할 만큼 옆사람과 거리는 턱없이 좁아서 한 명이 감기에 걸리면 전염되기 쉽다. 독감에 걸려 며칠 고생하다가 겨우 나았는데 주위 직원들이 그대로 옮아 굉장히 미안했던 적이 있다.
p. 143
상담원들도 부당함을 느끼지만 항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 혼자 부르짖어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상담 일이 대단한 성과를 내거나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님을 안다. 많은 월급을 바라는 게 아니다. 다만 상담원의 값어치를 매기는 방법이 지금보다 예의를 갖추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