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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고운 Feb 28. 2021

p. 73

 짧은 공허의 시간이 생겨 약속 장소 근처에 있는 서점에 들렀다. 평소라면 눈길을 끌었을 '수필', '소설' 코너는 그냥 지나쳤다. 요즘 개성 있는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강했던지 나는 '글쓰기의 모든 것'이 들어찬 매대 앞에 멈춰 섰다. 마음에 드는 제목의 글쓰기 책을 몇 권 펼쳐보았다. 일부는 당연한 말이었고 일부는 독특하고 유익한 내용이었다.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개성 있는 글쓰기 방법이 아니라, 좋은 글감을 찾기 위한 독특한 방법을.


 먼저 좋아하는 숫자를 정한다. 그리고 책 두세 권을 고른 뒤 해당 숫자가 적힌 책의 페이지를 모두 펼친다. 그 페이지 내에서 몇 개의 키워드를 정리해 자신의 일상과 결부시킨다. 이렇게 하면 글에 대한 마인드맵이 훨씬 잘 그려질 것 같았다. 나는 꽤나 괜찮은 생각을 잊지 않기 위해 휴대폰 메모장을 열어 간단히 끄적였다. 잠시 후 만날 사람으로부터 거의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나는 급하게 메모를 마무리하고 빠르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점을 나왔다.


 다음 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일단 펼치고 싶은 페이지를 정해야 했다. 나는 홀수를, 그중에서도 3과 7이란 숫자를 가장 좋아하기에 73을 택했다. 다음으로 내 책장에서 당장 끌리는 책 세 권을 집어 들었다. 김이나의 '보통의 언어들'과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이었다. 모두 73 페이지를 펼쳤다. 정리한 키워드는 이러했다. 거스름돈, 이별, 빈자리, 엄마, 입원, 냉장고, 사진, 충족, 쾌락. 나는 9가지 언어들로 때론 며칠 전으로, 1년 전으로, 10년 전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과거 속을 마구 헤집다 유독 한 키워드에 많은 상념에 빠져들었고 다양한 생각의 잔가지가 뻗어나갔다. 나는 작년 9월의 일을 떠올렸다.




 언제부턴가 누울 때마다 명치 쪽에 불룩한 덩어리가 만져졌다. 며칠 내내 지켜만 보다 결국 병원에 가기로 했다. 진료를 받고 CT를 찍었다.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외과 교수님을 다시 뵈었을 때, 빠른 시일 안에 수술을 해야 한다는 답변을 들었다. CT 상에서 보니 양성일 확률은 높지만 덩어리가 꽤 커서 떼어내야 한다고. 나는 막내답게 눈치를 보며 직장에 병가를 냈고 입원 수속을 밟았다. 어느덧 나는 대학병원 이름이 잔뜩 적힌 환자복을 입고 병실에 누워 있었다.


 입원 기간은 4박 5일이었다. 맹장 수술도 해본 적이 없기에 간단한 수술임에도 조금 겁이 났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이 기간이 다행히도 나에겐 무섭고 아프기만 한 시간이 아니었다. 물론 수술은 아프고 힘들었지만 수술 전날과 수술 후 회복 기간엔 심적으론 오히려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평소보다 잘 웃고 행복해했다. 이유가 뭘까. 몸의 빠른 회복을 위해 멘탈이라도 건강해야 한다는 나의 발버둥일까. 지금에서야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 일종의 허락을 받은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사소한 걱정과 불안감마저 내려놓아도 된다는.


 오랜만에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TV를 봤다. 나는 '신서유기', '대탈출'을 보며 입을 크게 벌린 채 깔깔거렸다. 그러다 식사 시간이 되면 문 앞까지 배달된 식판을 받아 뻐근한 배를 움켜 잡고 새하얀 죽이나 싱거운 반찬과 밍밍한 국을 쌀밥과 함께 먹었다. 저녁이 되면 창 밖의 노을을 멍하니 바라 봤다. 때론 집에서 가져온 가벼운 에세이집을 조금 읽었다. 그러다 졸음이 몰려오면 사소한 잡념 없이 빠르게 잠으로 빠져들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을 때 나의 마음은 가장 편안했다.


나에게 '입원'은 진짜 휴식 기간이었다. 조금 씁쓸한 의미부여인 것도 같다. 나는 나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궁금해졌다. 정말 온전히 쉬기만 하는 하루를 보내는 날이 인생을 통틀어 며칠이나 되는지. 당장의 학업을, 업무 실적을, 앞으로의 미래를 단 한 순간도 걱정하지 않는 진짜 쉬는 날이. 나는 직장인이 된 후에도 주말을 무의미하게 보내는 것을 아까워했다. 매일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대체로 성취감을 느끼고 실제로 발전을 이루기도 해서 좋은 습관이라 생각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날에는 나에게 조금 혼을 냈다.


 어릴 적부터 주어지는 여러 번의 공백기를 우리는 대체로 공백기답게 보내지 못한다. 방학이면 다음 학기를 위한 예습을 하고 졸업 후에도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에 몰두한다. 직장인이 되어서도 제2의 삶을 위해 퇴근 후 다른 분야 공부에 도전한다. 물론 자기 발전을 위해선 좋을 수 있다. 문제는, 이게 너무 당연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다수가 이런 삶을 보내니 쉬고 있는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안겨다 준다. 힘들어진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우리들의 어쩔 수 없는 생존 방식일 순 있지만, 정말 쉬어야 할 때 온전히 쉬질 못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제 우린, 쉬는 것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기 위한 '노력'도 해야 하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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