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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고운 Feb 14. 2021

느슨한 설 연휴

사흘 간의 일기

 설 연휴로 오랜만에 본가에 내려왔다. 평소답지 않게 한적한 동네에 많은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하지만 주변 공기는 소란스럽지 않고 고요했다. 차 트렁크에서 짐을 챙겨 대문을 열고 계단을 올랐다. 두 개의 문을 더 여니 오래된 집 특유의 눅눅한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싫으면서도 좋은 냄새였다. 퇴근 후 바로 내려온 터라 연휴 전날은 피곤함을 이기지 못해 씻고 곧장 노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알람 소리 없이 커튼을 통과한 햇살만으로 일어난 연휴 첫날, 잠시 시내로 나가 예전에 자주 갔던 서점에 들렀다. 사실 연휴 내내 읽을 책 두 권을 챙겨 왔지만 오랜만에 서점 특유의 감성을 느끼고 싶었다. 친절하신 사장님 덕분에 두 권의 소설책을 집으로 데려왔다. 새로 산 책을 읽을까 했지만 흐름을 끊기 싫어 책갈피가 끼워진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다시 펼쳤다. 그 날은 쉬는 내내 책장만 넘겼던 것 같다.


시내의 작은 단골 서점에서 산 책들.


 설 당일이 밝았다. 전날 사온 전과 과일, 떡국 등을 준비해 집에서 간단히 차례를 올렸다. 부모님, 동생들과 둘러앉아 아빠가 틀어놓은 '전원일기'를 보며 떡국을 먹었다. 전과 함께 달콤 쌉싸름한 막걸리도 한 잔 마셨다. 친척집에 가는 대신 외할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렸다. 친구들에게도 즐거운 명절 보내라는 문자를 보냈다. 오후에는 영화를 한 편 봤다. 개봉된 후 영화관에서 보고 싶었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었다. 줄거리가 탄탄해 몰입해서 봤다. 후반부는 조금 오글거렸지만 나까지 웅장해지는 희망찬 결말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가장 적은 분량을 차지한 부장님이었고 가장 많은 답을 던져주고 가셨다. 남은 여가 시간엔 공부하는 남동생 옆에 앉아 또 책을 읽었다. 이야고의 이간질에 화를 내면서, 오셀로의 질투에 눈먼 모습에 속이 터지며, 그리고 데스데모나의 성숙한 사랑에 감동하며 '오셀로'를 완독했다. 한 권으론 아쉬워 '오셀로'와 함께 가져왔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첫 장인 니체의 영원 회귀 사상을 반복해 읽다 뜨끈한 이불속에 몸을 파고들었다.


집에서 챙겨 온 명작 두 권.


 연휴 셋째 날, 가족들과 명절에 남은 음식으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함께 담소를 나누다 다시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다. 어제 읽었던 책을 펼쳐 들었다. 난이도가 있어선지 두 번째 읽는데도 머리가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서점에서 샀던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을 읽기 시작했다. 초반이지만 제목의 의미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바깥은 여름일지라도 안은 차갑고 시린 겨울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집에만 있다 보니 몸이 근질근질해졌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마스크를 쓴 채 밖을 나섰다. 정처 없이 동네를 한참 걸었다. 하천길을 따라 걷다 잠시 멈춰 멍하니 물소리를 들었다. 청둥오리 떼가 물을 마시는 건지 두 발을 든 채 몸의 절반을 물속에 처박고 있었다. 비닐이 줄줄이 덮인 밭두렁 사이 비포장 도로에선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주인을 이끌며 산책 중이었다. 노을 진 산 아래 그들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돌아갈 때도 일부러 지름길을 피해 골목을 돌고 돌아 집에 도착했다.


하천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한참을 바라봤다.

 책 읽는 시간이 많았던 걸 보니, 잘 쉰 것 같다. 예전엔 가족끼리 근처에 드라이브라도 갔었는데, 차가 내내 집 앞에 멈춰 있으니 설 연휴 내내 각자 조용한 일상을 보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내셨는지 궁금해 브런치 검색어에 '설 연휴'를 입력했다. 몇 개의 글에서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거북이 속도로 이동하며 도로에 오래 갇혀 있지 않아도 되고, 남의 제사를 위해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설답지 않은 설이었다. 그래서 다수가 편안한 명절이었다. 코로나로 인한 몇 안 되는 씁쓸한 이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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