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호 열차는 가능한 한 홀수 번호를, KTX의 경우 A나 D 좌석을 예매한다. 기차를 자주 타본 사람이라면 금세 눈치챘겠지만 모두 창가 쪽 좌석 번호다. 덜컹거리는 열차 안에서 지나가는 여러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복잡해진 마음이 잠깐이라도 씻겨 내려가곤 한다. 창밖의 모습은 도착지에 멈춰 서기 전까지 시시각각 변한다. 도심지에선 신축 고급 아파트와 여러 기업들의 고층 빌딩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거대한 건축물들에 괜스레 내 마음까지 웅장해진다. 외곽으로 접어들게 되면 좀 전에 빌딩들에 가려져 있던 산의 절경이 내 시선을 빼앗는다. 산 아래엔 낮은 주택들이 띄엄띄엄 모여 있고, 그 사이엔 비닐하우스나 논과 밭이 보인다. 간혹 비포장 도로에선 경운기가 천천히 지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해안 지역을 지나갈 때면 끝없이 펼쳐진 푸른색 바다가 나타난다. 어둠이 깔리기 전 바다는 진주가 둥둥 떠다니듯 햇빛에 반짝거린다.
여행할 때뿐 아니라, 단순히 조금 먼 곳을 가야 할 때도 나는 기차를 애용하곤 한다. 가장 탁 트인 창문으로 이런 정경들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넓어진 시야에 내 마음의 폭도 커지는 기분이다. 색채감 있는 바깥을 달리다가 갑자기 터널이 기차를 순식간에 삼켜버리는 순간도 좋아한다. 덜컹거리는 소리만이 들리고 차 안의 공기엔 적당한 적막감이 감돈다. 그리고 큰 창으론 검은 배경에 내 모습이 비친다. 터널 속에선 창문이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 거울에 들어찬 내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일도 좋다. 그러다 시선이 나를 벗어나면 다른 승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책을 읽거나 누군가와 문자를 주고받고, 팔짱을 낀 채 잠들어 있는 승객들. 그 노곤한 행위들에, 졸음이 몰려온다. 의자를 뒤로 젖히며 몸을 한껏 파묻어 눈을 감는다.
이렇듯 창가 자리에 앉게 되면 이동수단으로써만이 아니라 소소한 일탈을 보낼 수 있는 작은 여행의 역할마저 해준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대중교통, 버스도 마찬가지다. 특히 비가 축축이 내리는 밤, 창가 자리에 앉아 눈물 같은 빗방울들이 창문을 타닥타닥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이 우산으로 몸을 반쯤 가린 채 횡단보도를 잰걸음으로 건너는 모습과 젖은 도로 위에 반사된 흐릿한 불빛들, 그리고 습한 공기로 한층 더 무게감 있어진 여러 빌딩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걸 가장 좋아한다. 그 사이사이로 마치 도트무늬처럼 박혀 있는 빗방울들에 번진 불빛들을 보다 보면 따뜻한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든다. 여기에 버스 기사님이 라디오까지 틀어 주신다면, 몽환적인 분위기는 한껏 고조된다. 라디오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괜찮다. 이어폰을 귀에 꽂아 휴대전화 속 나만의 플레이리스트에서 인디음악을 재생한다. 잠시 딴 세상에 와 있는 기분이다.
스스로에게 잠시라도 이런 시간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바빠진 삶 탓에 쉬는 것마저 강제성이 부여되어 버렸지만 정말 의무적으로라도 틈틈이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걸 느끼는 요즘이다. 이동 중에 하루 종일 붙잡고 있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잠시 넣어 두고, 창가 자리에 앉아 감상에 살짝 젖으며 바깥 풍경을 바라보자. 우리, 조금 쉬면서 가도록 하자.
사진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