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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했던 하루

잠깐의 심연 도피

by 글고운

몇 주간 무력감과 우울함이 꾸준히 나의 일상에 침투했다. 어렵게 올려놓았던 자존감은 다시금 낙하하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안전한 길을 벗어나 좁고 울퉁불퉁한 길로 급커브를 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나의 무모한 계획에 지인들은 걱정 어린 시선으로 더 현명한 방법을 제안했다. 하나를 내려놓지 않고도 새로운 하나를 얻기 위해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다고. 얼마 전까진 그 최선의 방법을 별 탈 없이 꾸준히 실천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붙잡고 있는 것으로 얻는 외적인 안정감(경제적, 사회적 위치)보다 내적인 안정감(심리적 요소, 가치관 추구)을 애타게 갈망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생각이 많은 편이지만, 며칠 동안 깊은 사색에 잠겼다. 침잠해 있던 속마음을 하나둘 꺼내보기 시작했다. 이 감정이 곧 흘러갈 단기적인 것에 불과한 일인지, 정말 내려놓아야 할 순간인지에 대해. 무거운 고민이 계속될수록 나는 점점 지쳐갔고 머릿속은 검은색 크레파스로 온통 칠해진 스케치북 같았다.




그러다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금요일 저녁이 되었다. 오랜만에 데이트를 하는 날이었다. 밤에 만나기로 하여 빈 시간이 꽤 많았다. 나는 저녁도 해결할 겸, 책도 읽을 겸 샌드위치 카페에 갔다. 두 번째 방문이었다. 다행히 이번에도 그 시간대 손님은 나 한 명뿐이었다. 똑같은 뉴욕 샌드위치를 주문했고 아이스 카페라테를 시켰다.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오랜만에 식감이 생생했다. 바로 라테를 조금 마셨다. 커피의 향과 맛이 부드러웠다. 이 행복감을 이어가기 위해 가져온 책을 꺼냈다. 요즘 읽고 있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 '도덕적 혼란'이었다. 다섯 번째 챕터 '다른 곳'을 읽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지금의 내 상황과 책 속의 내용이 대부분 일치했다.


그렇게 쳇바퀴를 도는 모습, 그들은 진부한 일상에 함몰되어 있었고, 더 높은 진리에 대해 숙고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우월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향수에 잠겼다. 그러다가 고아가 된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다. 추운 밤에 뒤쪽 텃밭에서 감자 한두 개를 훔치다가 안락한 가족생활 모습을 들여다보는 맨발의 부랑아. 나는 이런 애처로운 시나리오로 스스로 괴롭히다가, 서둘러 창을 다시 닫아버리곤 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어딘가에서 방향을 틀 기회를 놓쳤다면, 그래서 나의 미래를 놓쳤다면? 그것은 무서울 정도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내 앞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 채 중요한 주제에 관해 심각한 생각을 하는 밤의 존재가 될 것이다.


무서울 정도로 지금의 내 방황과 닮아 있었다. 많은 문장을 필사했고 곱씹었으며 가만히 느꼈다. 책 속의 인물은 나 또한 그렇다며 내 어깨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얹었다. 막혀 있던 가슴에 조금씩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만족스러운 식사와 독서를 마치고 밖을 나오니 하늘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조금 멀리 걸어가 보기로 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아이유의 'Coin'을 재생했다. 차들이 도로와 마찰을 빚으며 쌩쌩 지나가는 소리, 퇴근하는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 내 옆을 지나가는 자전거 소리가 '강자에게 더 세게 I love gamble......'로 시작되는 노래와 싫지 않은 불협화음을 이루었다. 계속해서 걷다가 공원으로 들어섰다. 배드민턴을 하는 사람들, 아이의 손을 잡고 산책을 나온 젊은 부부, 운동 기구 위에서 몸을 열심히 움직이는 어르신들을 지나쳤다. 조금 뒤 갑자기 빗방울이 이마에 차갑게 내려앉았다. 봄비였다. 날씨를 보니 금세 그칠 비여서 우산을 따로 사지 않았고, 역시 알마 안 있어 비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이번엔 하천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의 옷차림은 본격적인 운동을 위한 간편한 복장으로 바뀌었다. 나는 네이비색의 얇은 트렌치코트에 낮은 굽의 로퍼를 신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좋아하는 노래들을 연달아 들으며 물의 잔잔한 흐름을 보았고 달빛에 비친 조명이 켜진 다리의 모습을 멍하니 감상했다. 엔도르핀이 계속 생성되었다. 휴대폰 화면에 만 보가 찍혔을 때쯤 나는 남자 친구를 만났다.


계속 쳐져 있는 나를 위해 벚꽃을 보러 가자고 말했다. 혼자 오롯이 보낸 시간들 덕분에 유달리 기분이 좋았던 나는 드라이브할 생각에 행복에 겨운 리액션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차 안에서 신나는 EDM을 들으며 근처 호수 공원으로 향했다. 자정이 다 된 시간에 도착해서인지 인적이 드물었다. 몇몇 커플들이 분홍빛 꽃잎들이 무성한 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도 그 장면에 합류했고 마스크로 얼굴은 반쯤 가렸지만 오히려 그래선지 만족스러운 사진 몇 장을 건졌다. 그리고 함께 손을 잡고 벚꽃길을 걸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우린 쿵쿵 울리는 신나는 음악과 함께했다. 우리의 데이트는 완벽했고 덕분에 행복한 금요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근래 들어 가장 완벽한 하루였다. 부정적인 감정이 끊임없이 밀려들었던 일상이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방인처럼 배회했던 거리는 도시의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거리가 되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잠깐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행복에 겨워했던 금요일엔 거창하고 특별한 이벤트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에. 소확행이 몇 번 계속되었을 뿐인데 만족스러운 하루가 되었다. 다시 힘을 내보기로 했다. 조금만 더 버텨보기로 했다.


어쩌면 삶은 심연 속에서 잠시 고개를 내밀며 숨통을 트였다가 다시 가라앉는 행동의 연속인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고 성숙해질수록 그 심연을 조금 더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사진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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