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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고운 May 30. 2021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데미안-헤르만 헤세(상)

  유년 시절을 지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봤을 동화책을 시작으로, 내 삶의 판도를 바꾼 '데미안'을 소개해보려 한다.


 '신데렐라', '백설공주', '헨젤과 그레텔'과 같은 대부분의 세계명작동화들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선과 악이 명확하다는 것. 주인공은 선하고 주인공과 대비되는 인물은 대체로 악당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런 이유로 어릴 적엔 옳고 그름의 경계가 뚜렷했다. 허가된 것과 금지된 것 사이에 큰 틈이 존재했다. 그러나 성인이 채 되기도 전에 우린 알게 된다. 동화는 정말 동화일 뿐이라는 것을. 선과 악 사이에 아무것도 없었던 빈틈이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채워진다. 이에 우리는 혼란을 겪기 시작한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훨씬 어린 시절부터 그 경계가 허물어짐을 경험했다. 그가 라틴어 학교에 재학 중이던 유년 시절을 회상하며 데미안은 시작된다. 10살의 싱클레어에겐 두 세계가 존재했다. 교양 있고 신앙적인 삶을 사는 부모님과 따뜻한 누나들이 있는 평화롭고 화목한 집이 첫 번째 세계였고, 반대로 주정뱅이들이 배회하고, 강도, 살인 같은 섬뜩한 일들이 발생하는 곳이 두 번째 세계였다. 그런데 그는 이상함을 느꼈다. 전혀 다른 두 세계가 서로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내가 안정을 느끼는 집이란 공간에선 동시에 여러 추문과 다툼, 폭언들이 난무하는 어두운 세계도 품고 있었다. 그곳엔 종종 자신도 존재했다. 싱클레어는 혼란스러웠고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싱클레어가 완전히 두 번째 세계에 발을 들이는 일이 발생했다. 그는 불량 학생 프란츠 크로머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그에게 약점을 잡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싱클레어는 크로머의 노예가 되었다. 그는 따뜻한 가정이 있는 첫 번째 세계로 돌아갈 때마다 엄청난 이질감과 자괴감이 들었고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때, 싱클레어의 인생의 구원자인 막스 데미안이 나타났다.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첫 만남은 '카인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아담과 하와에겐 카인과 아벨이란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동생 아벨의 제물만 반기면서 카인은 아벨을 죽이게 된다. 카인은 창세기 최초의 살인자였다. 그는 벌로 남들이 그를 보면 두려워하게끔 이마의 표식을 받는다. 학교에선 카인을 부정적인 인물로 가르쳤다. 하지만 데미안의 생각은 달랐다.


"아주 오래된 옛이야기는 대부분 사실이지만, 그 사실들이 언제나 적절하게 기록되고 올바르게 해석돼 왔다고 볼 수는 없어. 간단히 말해서, 난 카인이 엄청난 사람이었고, 사람들이 그가 두려워서 그를 탓하는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생각해. 카인 이야기는 사람들이 가볍게 떠들어대는 터무니없는 소문에 불과한 거지. 그런데 카인과 그 자손들이 표식을 지녔고 남들과 전혀 달랐다는 것만은 사실이라고 생각해."


  살인자를 비범한 인물로 만드는 그의 의견에 싱클레어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는 데미안에 의해 그동안 당연시했던 것들을 의심하고 비판하는 사고를 가지게 되었고, 획일화된 관념이란 벽에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했다. 현대 삶에 대한 물음표가 생긴 것이다. 이후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계속해서 인생 멘토가 되어준다. 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 싱클레어 괴롭혀왔던 크로머는 데미안의 알 수 없는 도움으로 인해 오히려 그를 피해 다니면서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크로머와의 일이 해결되자 싱클레어는 자신의 치부를 알고 있고 이와 관련되어 빚을 졌다는 이유로 데미안을 점점 멀리하게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둘은 견진성사 수업 시간에 재회하게 되었다. 여기서 데미안은 어린 싱클레어에게 또 다른 충격을 안겨주었다.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에 관한 이야기였다.


"언덕 위에 웅장하게 서 있는 세 개의 십자가에서 간사한 도둑 이야기가 나오다니, 너무 윤리적이고 감상적이지 않아? 명백히 추악한 잘못을 저지른 자가 갑자기 회개하며 후회의 눈물을 흘리다니. 무덤 코앞에서 하는 그 따위 회개가 무슨 소용이야. 안 그래? 이건 선교 목적으로 감상적으로 떠들어대는 거짓 설교에 불과해. 만약 내가 두 도둑 가운데 한 명을 친구로 택한다면, 적어도 신뢰가 있는 상대를 뽑겠어. 눈물 짜며 징징거리는 개종자 말고. 다른 도둑이야말로 사나이답고 개성 있는 사람이야. (......) 아마 그도 카인의 후예일 거야."


"나는 사람들이 신을 숭배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아. 그렇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전부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해. 인위적으로 분리한 절반만 인정할 게 아니라. 우리는 신에게 예배하는 동시에 악마에게도 예배해야 해. 그래야 옳아. 그게 안 된다면 너 스스로 악마까지도 품어내는 그런 신을 만들어 내서, 세상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들 앞에서 눈을 감아버리지 않도록 해야 해."

 

 싱클레어가 유년 시절 느꼈던 두 세계가 다시 등장했다.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그 당시 싱클레어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성은 어두운 세계였다. 그는 아직까지 두 번째 세계에 드나드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고 억지로 벽을 세우고 회피하려 했다. 성은 부끄러운 것이며 숨겨야 마땅한 욕망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 세계에 속한 나 또한 나 자신이라고 말했다. 회피를 멈추고 절반의 내 모습도 인정해야 한다고. 데미안은 더 나아가 싱클레어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금지된 것'은 영원불변의 것이 아니라 바뀔 수 있어. 또 우리는 신부님 앞에서 누군가와 결혼하면 당장 동침할 수 있지만, 어떤 민족은 그렇지 않아. 오늘날까지도 말이지. 그러니까 우리들은 '허락된 것'과 '금지된 것'을 스스로 알아내야 해.(......) 게으르고 생각하기 싫어하고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냥 복종해버려. 그 편이 쉬우니까. 내면에서 자신만의 법을 느끼는 사람들은 더 어려워. 다른 명예로운 사람들이 매일같이 하는 일이 그들에게 금지된 것일 수 있고, 다들 금기시하는 일을 스스로에게 허용하기도 하거든. 사람은 각자 독자적으로 판단해야 해."

 선과 악의 세계 살인, 강간과 같은 아주 극단적인 상황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이들에게 똑같은 기준으로 적용되지 않. 넓은 의미에선 지역과 나라별로, 좁게는 개인마다 모두 다른 것이다. 나라별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동일한 상황에 대해 어떤 나라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다른 나라는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개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특정 말이나 행동에 관해 어떤 이는 나쁜 것이라 말하고 다른 이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두 세계의 공존을 모두 인정하는 동시에, 나누는 기준은 결국 스스로 판단해야 함을 깨닫게 해 준다.


 더 오랜 시간이 흘렀다. 싱클레어는 좀 더 깊숙이 사춘기에 접어들었고 그럴수록 어두운 세계에 잠식되어 갔다. 매일 술을 마시며 방탕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렇게 자기 파괴적인 일상을 보내던 중 그에게 첫사랑이 찾아왔다.


그 봄날의 공원에서 내 시선을 끄는 한 소녀를 만났다. 키가 크고 날씬하고 우아한 옷차림에, 영리한 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싱클레어는 그녀에 대한 몽상을 시작했고,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랑의 힘은 위대했다. 베아트리체는 싱클레어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선사했다. 음주와 싸움질을 그만두며 방탕한 생활을 청산했고 독서와 산책을 즐기기 시작했다. 짝사랑이든, 연든 사랑이란 감정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자신이 가진 단점을 고치려 하고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려 한다. 이 당시 싱클레어는 처음으로 스스로 첫 번째 세계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시도했다.


 싱클레어는 뿐만 아니라 그녀에 대한 사랑과 신념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는데, 바로 그림이었다. 그는 여러 날에 걸쳐 베아트리체를 생각하며 붓질을 했다. 그런데 완성이 될수록 싱클레어는 깨달았다. 그림은 베아트리체의 얼굴이 아니었다. 바로 막스 데미안의 모습이었다.


소녀라기보다는 차라리 소년의 얼굴이었고, 머리칼도 그녀의 옅은 금발이 아니라 붉은빛이 도는 갈색이었다. 턱은 단단하고 야무져 보였고 입술은 꽃잎처럼 붉었다. 전체적으로 약간 딱딱하고 가면 같은 느낌을 주었지만, 인상이 아주 강렬했고 신비로운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싱클레어는 수년간 소식을 듣지 못한 데미안을 그리워했다. 그는 본가에 있던 문장의 새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완성된 그림을 데미안에게 보냈다. 얼마 후 싱클레어는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쪽지를 한 장 발견했다. 거기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쪽지를 보낸 이는 바로 막스 데미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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