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와 비현실적인 실제
1. 2024년 11월 20일
몇 일전 안산시 단원구청에서 진행된 4·16 생명안전공원 건립 설명회를 다녀왔다.
10년간의 긴 기간 동안 흩어진 아이들이 다시 한곳에 모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화랑 유원지 앞에서 반대하는 화랑지킴이 세력을 출근길에 수도 없이 봤기에 쉽지 않은 행사가 될 것이라고 마음을 먹고 설명회 장으로 들어갔다.
'나라를 구한것도 아니고', '문재인 개새끼', '종북좌파', '세월호 아이들 그만 팔아먹어라'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외쳐대는 통에 건립 설명회의 내용은 하나도 들리지 않은 채 그들의 맥락없는 아우성만 장내를 가득 메웠다.
도대체 그들이 울부짖는 화랑농장과 세월호참사로 사라진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이란 말인가?
'참사의 정치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한 보편타당성을 생각하려고 하지만 마음 속에서 울려퍼지는 그 들의 태도에 대한 것은 지극히 한 인간으로의 분노를 참을수 없게 한다.
발언 중인 안산시장은 질문이라는 것을 핑계로 화랑지킴이 세력의 일장연설을 그대로 발언하게 하는 태도만 보이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 그 아수라장에서 뒷편 가운데 우뚝 서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사람은 세월호 희생자의 어머니 였다.
이러한 아수라장은 익숙한 광경이기에 내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하품으로 장내에 울려퍼지는 궤변을 받아들일 여유를 주려는 나에게 가운데 우뚝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자 갑자기 뒷통수가 얼얼해 지며 가슴 팍이 뜨거워 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윽고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이 차올랐다.
'너희들 앞마당에 지어라', '세월호 애들 데리고 안산을 떠나라'....
2014년 4월 16일 그리고 2024년 11월 20일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 엄마는 저렇게 서있었다.
팽목에서도, 서울에서도, 안산에서도 저렇게 굳건히 서있었던 것이다.
'집값이 떨어진다, 안산을 다시 살려야 한다, 대한민국을 이렇게 둘수는 없다'
지옥이 있다면 여길까?, 그들은 어찌 그렇게 잔인할수 있을까, 저들은 저렇게 '혀'라는 칼로 생을 겨우 이어나가는 자들에게 휘두른다.
궤변의 아우성이 끝나고 설명회장을 나오면서 어머니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뜬 구름 잡는 눈물 참는 이야기로 둘러대며 이야기를 이어나갔지만 아내 돌아서서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생각했다.
"엄마 , 당신같은 분을 보면서 내가 이 잔인한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2. 2014년 4월 16일
그 날은 화랑유원지가 집결지 였다.
안산 놈들이 다 모이는 날, 그 날은 바로 동원예비군 훈련날이었다.
전역 한지 1년이 지나 예비군 훈련에 처음 참여하며 개구리 군복이라는 별 것도 아닌 자부심으로 대충 쓴 모자를 고쳐쓰며 화랑유원지 집결장 버스 앞에서 그리도 담배를 태우며 시간을 죽였었다.
한 대 피면 또 아는 놈, 한 대 피면 또 아는 놈 다섯개피 쯤 되었을때 이내 버스에 승차하고 강원도 동원예비군 훈련장으로 가던 날, 그 날은 2014년 4월 16일 이었다.
핸드폰을 제출하라는 소리에 투덜대며 제출하며 안산 놈들과 2박 3일 동안 지낼 내무반으로 들어가던 순간 갑자기 내무반으로 울려퍼지는 방송소리.
"현재 안산시 한 고등학교에서 여객선이 침몰하여.... 고등학교 2학년 가족이 있는 예비군은 급히..."
대수롭지 않은 줄 알고 내무반에 누워 커다란 창문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내 복도로 몇 놈이 급히 뛰어간다.
"아... 존나 부럽네..."
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한번 내려가 담배를 꼬라물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니 하늘은 고요하고 고요하다.
"아...우리 OO도 고등학교 2학년인데 나도 간다고 할까...?"
"씨팔.. 동원예비군 강원도까지 또 오는 건 더 싫다...!"
박근혜 정부는 당시 예비군을 강화한다는 정책으로 A형 텐트까지 2인 1조로 설치한 후 숙영까지 실시했는데 하필 그날 저녁부터 폭우가 내려서 산사태가 날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홀딱 젖은 몸을 숙영지 아래에 식당에서 몇 십명이 뭉쳐서 있는 가운데 어떤 놈이 또 다시 이야기를 꺼낸다.
"야 아까 오전에 여객선 뭐시기로 간 놈들 운빨 지리네..."
그렇게 2박 3일, 마지막 날 핸드폰을 건네받고 인터넷을 들어가보니 이미 세상은 난리였고 내 전화에는 온갖 문자와 부재중 전화가 몇십 통씩 와있었다.
내 동생은 안산시에서 나고 자란 97년생이었고 단원고 학생들은 내 동생과 같은 나이의 친구들 이었다.
돌아온 안산은 내가 알던 그 안산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의 세월호 참사의 이야기는 시작된 것이다.
3. 2023년 3월 2일
세월호 가족과 함께 하게 된 것은 2023년 3월 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상상과는 다르게 웃을땐 웃고, 슬플땐 울고, 화낼땐 화내고 나도 어쩔수 없이 그런 '편견'에 사로잡혀서 그들을 그렇게 생각하고 겁냈던 것도 있는 것 같다.
이제 햇수로 7살이 되어가는 아들을 키우면서 난 항상 겁이 났던 것 같다.
눈 앞에서 죽어버린 우리 엄마의 처절한 모습을 보면서 나도 죽음을 늘 생각했고 지속적인 우울감은 나를 힘들게 했었지만 결혼과 아이를 만나게 되면서 어느 정도 생을 살아가고 있다.
(죽고 싶지만 죽을 수 없다, 그런 지속적인 우울감을 상쇄해 주는 것은 아내와 아이의 존재이다.)
이 곳 세월호 부모님들은 10년째 아이들의 죽음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OO엄마, OO아빠 나도 마찬가지지만 나도 아이를 낳은 이후 부터는 OO아빠 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 처럼
아이의 탄생은 신이 나에게 또 다른 임무를 맡긴 것 같은 소명의식을 가지게 한다.
이 부모님들과 함께 하며 느끼는 것은 '어떠한 형태로도 아이와 함께 살아간다' 라는 느낌 이며 아침 부터 저녁 까지 보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고행을 하는 수행자' 를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된다.
그럴때면 어느샌가 그들의 아이들이 없지만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의 수행의 모습에서 마치 환상처럼 그들의 본적 없는 아이들이 내 마음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한다.
4. 지극히 '안산'적인 이야기
나는 안산사람이다.
6살 무렵 안산에 와서 학창시절을 모두 안산에서 보냈고 결혼해서 아이와 함께 안산에서 살고 있으니 근 30년 넘게 안산에서 생을 살아가고 있다.
어릴적 부터 친구들가 안산 여기저기 뛰어놀면서 말하는 것은 안산은 진짜 심심한 동네 라는 것이다.
외부 사람들이 안산으로 놀러오면 보여줄것도 없고 갈 곳도 없고 그렇다고 뭐 딱히 있어야 할게 없는 것도 아니고 안산은 우리에게 늘 그런 도시라고 사람들에게 설명하곤 했다.
하지만 30년이 지나고 가끔씩 생각해보면 내가 안산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확실하게 있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 진양슈퍼를 지나 화랑유원지 교통교육판을 지나 운동장에서 공을 한번 모르는 친구들과 차고 이내 롤러스케이트 장까지 뛰어들어가 바라보는 원곡동 쪽의 큰 "낫소 (스포츠브랜드)" 간판 뒤로 지나가는 붉은 노을
뻘로 메워버린 신도시, 얼마 생기지 않아 차도 없고 아파트만 덩그러니 있던 동네에서 국밥집 아들이라며 놀림받으며 엄마를 도와 먹고 살았던, 수 많은 서로를 향한 낙서들과 흩어놓은 이야기들을 흩날리지 않게 붙잡으려고 뛰어다니던 일동 굴다리 밑, 섬 같은 팔곡동에서 앞이 보이지 않던 삶을 탈출하기 위해 뛰어왔던 수많은 노력들, 그리고 나의 아내와 함께 살고 있는 본오동.
이상하게도 나는 이 도시를 싫어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십여년 전 '건축학개론' 이라는 영화에서 나온 대사 중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는데 바로 이런 대사이다.
상황은 이렇다, 주인공이 억척스러운 엄마에게 강북 집을 팔고 강남으로 이사가자는 투정인 씬.
"집이 어떻게 지겨워 집이 그냥 집이지"
그렇다. 이 도시는 나에게 그냥 집 같은 곳 이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 미워한 사람, 슬펐던 일, 기뻤던 일 이 도시 속에서 나의 삶이 이루어져 있고 안산이라는 도시는 몇십년전의 신도시라는 미명 아래 비교적 온전히 모든 것들이 내 어릴적 그대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제 30년 좀 넘게 세상을 살아온 내게 인간을 살게 하는 것은 '추억' 인것 같다.
시간은 항상 앞으로 흐르고 지금의 내 모습도 과거가 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글을 썼다라는 행위는 이미 과거의 이야기 인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고 나니 더 슬픈 일은 추억이 기하급수 적으로 늘어난다는 점이다. 자식과 함께 살아가는 생은 과거의 생과는 비교도 할수 없을 만큼 커다란 행복이다.
이 안산이라는 도시에는 모든 추억들이 깃들어있다.
고로 이 도시가 '나를 살게 하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5. 비현실적인 실제
진도 바다에서 304명, 서울 한복판에서 159명, 그리고 찰나의 시간에 공항에서 착륙하던 비행기에서 175명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언젠가 TV를 보면서 법의학자가 이야기 한 말 중에 기억이 남는 말이 있다.
'저는 살아있는 게 신기해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있다는게'
나는 늘 평생 살 것 처럼 생을 살아간다, 죽음이라는 건 언제나 생각하지 못하게 설계된 것 처럼.
생이 나에게 주는 것은 무엇이고 사가 나에게 빼앗아 가는 것은 또 무엇인가?
아니면 생이 나에게서 빼앗아 가는것과 사가 나에게 주는 것은 또 무엇일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도 나는 평소와 같이 밥을 먹고 일을 하고 그렇게 살아간다.
나는 이 많은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행동할 것인가.
나는 언제까지 죽음을 '비현실' 적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엄마가 원인을 알수 없는 폐병으로 숨이 멎어갈 때 그저 그대로 그 '사'를 받아들이고 살며 한켠에 '우울'이라는 심연과 함께 영원히 살아갈 것인가?
새로운 '생'이 태어나서 그리고 다른 '생'이 나와 함께 연을 맺고 내가 생각하는 '생' 을 살아가야 하는데 나는 언제 까지 '사'가 '비현실적' 이라고 받아들이고 생을 살아갈 것인가.
다음에 나의 차례가 되어 혹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그 차례가 되었을때도 난 아무런 준비 없이 '사'를 받아들이며 두번째 '우울'이라는 심연을 새로운 친구로 살아갈 것인가?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한낱 천한 인간으로 남의 죽음을 나에게 비유해서 아로새기며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과거 그리고 죽은 자'가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내 마음속의 심연에게 읽어주고 싶다.
그리고 그 심연이 서서히 정화 됨을 느끼고 살아갈때 나는 비로서 '비현실적인 실제'와 함께 싸워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6. 너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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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18살, 두 단짝을 중심으로 보여진다.
18살, 누구나 지나왔지만 언제나 다시 돌아가고 싶은 나이가 아닐까 싶다.
생의 첫 번째 과도기에서 느끼는 혼잡한 감정들의 폭발이 일어나는 시기
사랑, 우정, 관계, 꿈, 세상 적어도 어른들에게 저당잡히지 않으면 그 시기는 너무나도 찬란한 시기이다.
영화는 그런 두 18살을 중심으로 수학여행을 가려고 하는 전날 하루를 마치 꿈 속에 있는 것처럼 보여준다.
너를 향한 마음이 사랑인지 혹은 우정인지, 그런 것에 대한 감정은 사실 18살에게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지금 생각해보면 어릴적 부터 나는 (91년생)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감이 심했다. 지극히 흘러가면서 배울수 있는 다양한 것들을 거세 당한 느낌, 아니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런 인간 기본적인 '사랑'에 대한 감정을 어떤 시기 부터 제약 당한 것일까?, 이처럼 '사회적인 선택'을 강요받으면서 살아온 이들에게 영화에서 보여지는 '신이 인간에게 준 아름다운 인간의 감정'을 이렇게 독립영화에서만 찾을수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또한 '나 (91년생)'은 비극에 대해서 너무나도 상세하게 알고 있는 하나의 사람이지만 이 영화는 비극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가 감상했을때 더욱 아름다운 영화라고 생각된다.
이 영화는 그 자체의 존재만으로도 아름다운 그들의 세월 (18살)을 그들이 살던 곳에서 보여준다.
'18살, 봄, 수학여행, 안산, 사랑'
온통 설레는 단어만 가득한 이 나열은 '세월호 희생자'의 존엄성을 높여주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뒤를 설명하기 위하여 본 영화의 감독인 조현철 감독의 수상소감을 소개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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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둔 아버지에게 용기를 드리고자 잠시 시간을 할애하겠습니다.
아빠가 지금 보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죽음이라는 게 단순히 '존재 양식의 변화'인 거잖아
작년 한 해 동안 내 첫 장편 영화였던 <너와 나>를 찍으면서
나는 세월호 아이들이 여기에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
영화를 준비하는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에게 아주 중요했던 이름들
박길래 선생님, 김용균 군, 변희수 하사, 이경택 군, 외할아버지 할머니, 외삼촌, 아랑쓰 그리고 세월호의 아이들 나는 이들이 여기 있다고 믿어.
그러니까 아빠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마지막 시간 아름답게 보냈으면 좋겠어
사랑합니다.
조현철 감독의 수상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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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그의 말 처럼 '존재 양식의 변화' 이다.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라는 소설의 제목 처럼 '나' 라는 실제는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나도 항상 실제로 존재한다. 그 비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나는 떠난 이들의 '존재 양식의 변화'와 동시에 '작별하지 않는다' 를 마음 속에 아로새기곤 한다.
얼마전 내가 읽은 별로 내키지 않았던 글 중 하나가 '어떤 상황이 있는 현장에 '세월호 아이들'이 함께 하는 기분이었다' 라는 장문의 글이었는데, 그 상황을 마치 '세월호 아이들'을 미사여구로 사용하는 기분이 들었다.
왜 당신들과 '세월호 아이들'이 함께 있나? , 좌파던 우파던 '세월호 아이들'은 당신과 함께 있지 않다.
왜 어떠한 사건에서의 특정 상황에서의 매개를 만들기 위해 '세월호 아이들'을 왜 상징으로 이용하는가?
수단으로의 성공을 이뤄냈다면 더 이상 그 수단, 이제는 멈추고 존엄의 영역으로 생각을 확장하기를 빈다.
이처럼 다양한 '의도 혹은 실수'가 넘쳐나는 세월호 관련 글과 영화 중 조현철 감독의 '너와 나'는 사건을 다룬 사람들을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양식의 변화'를 그대로 물결처럼 보여준다. 그리고 온전히 '작별하지 않은' 모습을 영화 위에 그대로 띄워준다.
웃음과 울음이 가득한 영화, 그게 나의 18살을 혹은 모두의 18살의 기억이 아닐까?
내가 보고 느낀 세월호 관련 영화 중 가장 온전히 존엄과 서정성을 지켜준 영화가 아닌가 싶다.
마지막으로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304명, 나는 그들과 '작별하지 않는다' 라는 말을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