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후반부터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근데 그게 "나"와 결혼하고 싶은 게 아니라, 나와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상 루트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결혼 또한 일종의 미션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대학 나오고 직장 다니고 어느 정도 돈을 모으면 그다음은 좋은 사람 만나 결혼을 해야 하는 게 '정상적인' 순서니까. 정상 루트를 따라가야 한다는 압박감에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살아온 만큼 남들한테 뒤쳐지고 싶지 않은 마음, 그것이 결혼을 결심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결혼'이라는 이벤트를 빼고 보면, 결혼한다는 것은 내 인생을 끝까지 함께 울고, 웃으면서 살아갈 사람을 결정하는 일이다. 대학, 취업, 이직 같은 삶의 선택보다 훨씬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한 일인 것이다. 나와 결혼하고 싶다던 전에 만났던 사람들은 '결혼'만을 이야기했지, '결혼 후 함께 할 수십 년의 인생'에 대해 '깊이 있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장 중요한 알맹이가 빠진 느낌이었다.
누군가가 결혼한 사람들은 "이 사람이다 싶어서" 결혼한 부류와 "어쩌다 정신 차려 보니" 결혼한 부류로 나뉜다 했다. 이에 기립박수를 치며 극히 공감했다. 먼저 "이 사람이다 싶어서" 결혼한 부류는 정말 부러운 사람들이다. 본인의 마음이 이끄는 선택을 한 것이니까. 대신에 나는 주변에서 훨씬 많이 볼 수 있는 "어쩌다 정신 차려보니" 결혼한 부류에 대해서 더 생각해보게 된다. 살면서 '어쩌다 보니'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되지만,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사실 그렇게 하게 된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 "어쩌다 정신 차려보니" 결혼해 있더라 하는 부류의 사람들도 사실은 본인도 알게 모르게 뭔가 생각하던 것에 맞는 것이 있어서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을 것이다.
'결혼하고 싶은 상대의 조건'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내가 말하는 '결혼하고 싶은 상대의 조건'이란 결혼 정보회사에서 점수 매길 때 필요한 조건들인 학벌, 직업, 재산 같은 숫자로 점수 매길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외부 조건들도 다들 스스로 알게 모르게 고려를 하고 있다. 결혼을 생각할 때 저 조건이 가장 우선순위에 있는 사람도 있고, 본인이 원하는 최소한의 커트라인을 정해놓고 그 기준을 넘은 다음에 다음 조건을 고려하는 사람도 있다. 일단 본인이 생각하는 저 외부 조건의 커트라인은 넘었다는 가정하에, '결혼하고 싶은 상대의 조건'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결혼 상대에 대해 '그 사람은 너에게 어떤 사람이야?'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가장 첫 번째로 떠오르는 대답. 바로 그것이 본인이 원하는 결혼 상대의 조건이다.
나는 혼자 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결혼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라서 나에게 결혼 결심 기준은 무엇일까를 오랫동안 생각해보았다. 예전에는 대화가 잘 통하고 함께 하면 재밌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그렇지만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로서는 갸우뚱했다. 내가 힘들 때 큰 의지가 되어주었고 딱히 결혼상대로 큰 흠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인가는 또 갸우뚱했다. 대화가 잘 통하고 즐거운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힘들 때 든든한 의지가 되어주는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다만 ‘이 정도 맞는 사람도 만나기 힘들지’하는 생각에 결혼을 결정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내가 결혼을 하고 싶은지 아닌지, 한다면 어떤 사람과 결혼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다 보니 문득 깨달은 게 있다. 결혼에 대한 질문보다 “내가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이 먼저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고 독립적이고 스스로 성장해나가는 걸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나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면 "서로 같이 성장해나갈 수 있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 나로 인해 그 사람도 더 성장하고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느낄 수 있고, 나 또한 그렇게 느껴지는 사람 이어야 한다. 이것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결혼하고 싶은 상대의 조건이다. 이런 나에게는 아무리 남들이 결혼상대로서 중요하다고 하는 다른 조건들이 다 좋아도, 저 단 한가지 조건이 맞지않는다면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저런 사람을 만나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하고 싶지도 않고 결혼 적령기가 지나가니 기준을 낮춰서 결혼하고 싶지도 않다. 결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 어떤 인연이 나타날지,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내가 할 수 있는 것 밖의 일이다. 하지만 어떤 인생을 살지는 내가 어느 정도 결정하고 행동해나갈 수 있다. 결혼 고민보다 내 인생 고민, 나의 생각, 나의 마음, 나의 가치관, 나에게 우선순위에 대한 고민이 먼저다.
모든 사람이 결혼을 결정할 때 '서로 같이 성장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내 가치관에서 비롯된 나에게 맞는 기준이다. 다만 ‘본인 만의 기준’은 꼭 잡아야 한다. 어떨 때 본인이 행복한지,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는 사람마다 다르니까. 본인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주변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에게 가장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다.
인생의 굵직굵직한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 올 때마다 마찬가지인 것 같다. 본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을 세워놓는 것이 꼭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이건 꼭 해야 돼, 이게 좋데, 저게 좋데' 하는 말들에 마구 흔들리고, 그에 따라가다 보면 ‘후회’가 늘 바로 내 등 뒤에 따라붙어와 있다. 본인만의 기준이 잘 확립되어있으면, 주위에서 어떻게 말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다. 설령 내 기준대로 선택한 그 길이 힘든 길이더라도 내가 선택한 길이라면 버텨 나갈 수 있다. 내가 가장 우선순위로 여기는 가치관에 따라 결혼한다면, 결혼 생활에 힘든 일들이 있어도 결혼을 결심했다는 것 자체에 후회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가끔 ‘그냥 이 사람이랑 결혼할까?’하는 생각이 빼꼼 고개를 들 때마다, 스스로 다시 보기 위해 쓰는 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