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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쓴 Nov 08. 2022

느리지만 조금씩 성장하는 중입니다.

  매일 독서실에서 혼자 공부하던 재수생 시절, 나의 유일한 낙은 다이어리에 <수능 끝나면 할 일> 목록을 하나둘씩 채워나가는 것이었다. 너무 오래전이라 그 다이어리의 행방은 모르겠지만, 내 기억에 그 목록이 한 30가지는 되었던 것 같다. 기억나는 것들의 예로는 해외여행 가기, 영어 회화 공부하기, 포토샵 배우기, 공연 보러 가기, 그림 배우기, 운동하기 등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배우고 싶은 것, 경험하고 싶은 것들이 참 많았다.

  바쁘게 살다가 갑자기 스케줄이 텅 비어서 시간이 넘치게 생기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멍하니 길을 잃어버린다. 갑작스럽게 가지게 된 많은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시간을 어떻게 쓰겠다는 계획이 없었던 경우는 물론이고, 계획이 있었다 하더라도 강제성이 없고 게을러져 흐지부지되기 쉽다. 나 역시 수능 끝나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집에서 '밥 먹고 미드 보고 자고'만 몇 달간 반복했다.

  그때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이런 상황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 같다. "뭐 끝나면 이거, 저거 해야지, 내년에 이거 해야지, 내후년에 저거 해야지"라고 습관적으로 계획을 짠다. 그리고 막상 그 시기가 오면 제대로 한 것도 없이 또 금세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이룬 것 없는 게으른 내 모습에 자책하고, 그러면서도 또 내년에 하고 싶은 일들을 적고, 또 계획대로 몇 개 하지 못한 나에게 실망하고 그런 상황의 반복이었다.


  그렇게 항상 <하고 싶은 일들>을 잔뜩 적어놓기만 하고, 제대로 하고 있는 게 없는 줄만 알았는데 최근 들어 번뜩! 알아차린 게 있다. 하고 싶은 일들을 꾸준히 적고, 그렇게 적은 내용들을 자주 보고, 또 그 일을 하고 있을 내 모습을 상상하고, 언제 어떻게 할지 구체적인 계획도 짜 보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아주 오래전에 내가 하고 싶어 했던 그 일을 내가 지금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내가 지금 여기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나는 책을 많이 읽었고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블로그에 책 리뷰 쓰는 것도 대학생활 동안 했었다. 그러면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꿈인 "내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렇게 내 <하고 싶은 일들> 목록에 "내 책 쓰기"가 추가되었다. 물론 여전히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쓰진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글을 꾸준히 쓰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 책 쓰기를 위한 여정에 큰 걸음을 뗀 것이라 생각한다.

  이와 비슷한 경험으로는 인도 여행, 마라톤, 피아노 배우기, 편집디자인 배우기, 독서모임 하기, 책 1년에 100권씩 읽기 등이 있다. 전부 지금 하고 있거나 예전에 했었던 것들이다. 물론 한 것보다 못한 것이 훨씬 많다. 하지만 그동안 항상 계획만 짜고 계획대로 하지 못한 나 자신을 자책했는데, 생각보다 꽤 많은 걸 해왔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이걸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것은 내가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해서 "잘한 일"보다 "잘하지 못한 일"에 더 집중해서 그랬던 것 같다.


  재수생 시절 이후로 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늘 다이어리에 <하고 싶은 일> 목록을 적는다. 그리고 이 목록 중에 한 80%는 못할 것이라는 걸 그간의 경험을 통해 안다. 하지만 20%라도 해낸다면 그걸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라는 것도 이제 안다. 그걸 적어놓고 상기시키고 하지 않았더라면 그 20%도 하지 못했을 것 아닌가?!

   나는 조금 느리지만 계속 성장해나가는 과정 속에 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뭐라도 하면 뭐라도 배우는 법이다. 그러니 나는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은 일들을 적고, 그렇게 적은 것들을 자주 보고, 또 그 일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자주 상상할 것이다. 언젠가 나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진짜로 그 일을 하고 있는 나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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