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준생 백수 시절에는 거의 매일 불안했고, 매일 자책했고, 매일 우울했다. 그때의 내가 가장 힘들었던 건 미래가 불안하다거나 남들에 비해 뒤처졌다거나 하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부차적인 것이었고 근본 원인은 지금 당장 뭔가 시작할 수 있는 돈이 한 푼도 없어서였다. 새로운 분야를 배워보고 싶지만 그럴 돈이 없었고, 독립하고 싶지만 독립할 돈이 없었고, 당장 생활비조차도 없었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데 숨 쉴 돈도 없으니 무엇을 할 의욕도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그때의 나는 돈 말고는 모든 걸 가지고 있었다. 아픈 데 없이 건강했고, 가족들도 건강했고, 부모님 집에서 살 수 있으니 주거 걱정도 없었고, 젊으니 시간도 많았고,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좋은 친구들도 있었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다는 '건강, 시간, 좋은 사람들'을 모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돈이 없다는 사실 하나가 나의 내면을 모조리 갉아먹어버렸다. 돈을 벌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자존감이 땅 밑으로 뚫고 내려가기 충분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안 되는 일을 쓸모없는 일로, 돈을 못 버는 사람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무탈하게 살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머니머니 해도 머니 덕분이다. 예전보다 한결 여유로워진 마음가짐과 주변의 좋은 사람들 덕분도 있지만, 솔직히 돈의 영향이 가장 크다. 직장을 다니면서 꾸준한 월급이 들어오고, 씀씀이도 크지 않아서 돈을 그럭저럭 모았다. 돈을 모으니 독립을 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삶의 만족도가 크게 높아졌고, 하고 싶었던 새로운 분야들도 배울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여유롭게 미래를 계획할 수 있게 되었다. 예기치 않게 월급이 끊기게 돼도 뭔가 다른 걸 시작할 여윳돈이 있으니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노후준비로는 턱도 없지만 백수 취준생 시절만큼 돈 때문에 벌벌 떨지 않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다.
인터넷상 어딘가에서 짤로 봤던 것 같은데 이효리가 방송에서 본인이 남편이랑 싸우지 않고 잘 지내는 이유가 "내가 돈이 많아서 그렇다."라고 했다. 물론 돈이 많다고 아무 문제 없이 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여윳돈이 있느냐 없느냐'가 무탈하게 일상을 살아가는데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효리의 자산이 바닷가 모래사장 만큼이면 내 자산은 그 모래사장에서 한 움큼만도 안되겠지만, 여윳돈은 절대적 크기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본인의 일상을 안정적으로 유지해 나갈 수 있는 돈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
여윳돈이 없으면 내가 내 인생을 주도해 나갈 수 없다. 계속 가족들이나 지인들에게 의존하게 되고, 그럴수록 본인의 선택권은 줄어든다. 돈의 여유가 생기면 '뭐해 먹고살지?'라는 걱정이 아닌, '내가 뭘 좋아하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의 여유와 마음의 여유도 생긴다. 수입이 아무것도 없는 때가 오더라도 잠시 쉬면서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불안하지 않을 정도의 여윳돈은 늘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 정도의 여윳돈이 있다고 해서 당장 눈에 보이게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내 심리적인 상태를 좋은 컨디션으로 유지시켜 줄 수는 있다.
앞으로 무엇을 하게 되더라도 여윳돈은 늘 남겨놓으려고 한다. 독립을 할 때도 독립할 때 필요한 돈 제외하고도 여윳돈을 충분히 남겨놓고 독립을 했다. 나에게 여윳돈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고, 주체적으로 자립해서 살기 위한 수단이다. 약간의 여윳돈 덕분에 무탈하게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이런 생활에 안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주체적으로 살기 위한 과정 속에 현재 잠시 무탈한 시간을 지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