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준생 백수 시절엔 김밥을 자주 먹었다. 싸고 빠르게 먹을 수 있지만, 라면보다는 몸에 좋을 것 같은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김밥 집에서 메뉴판을 보면 내 시선은 기본김밥과 참치김밥 사이를 서너 번 왔다 갔다 거린다. 기본김밥과 참치김밥은 보통 가격이 500~1,000원 정도 차이가 났다. 늘 몇 초 고민했지만 나는 대부분 가장 싼 기본 김밥을 시켜 먹었다.
카페를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간 달달한 카페모카를 가장 좋아했었다. 가격차이가 많이 안 나면 카페모카를 사서 아껴먹기도 했지만, 돈이 궁한 날이 더 많았다. 그런 날엔 메뉴판에 있는 아메리카노와 카페모카 사이에서 눈을 두세 번 굴린 후 아메리카노를 선택하곤 했다.
요즘도 김밥 집이나 카페를 갈 때마다 그때 생각이 난다. 이제는 그때처럼 메뉴판 앞에서 눈을 굴리며 가장 싼 걸 고르지 않아도 된다. 먹고 싶은 건 무엇이든 먹어도 된다. 심지어 가장 비싼 메뉴를 골라도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제는 딱히 먹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든다.
그렇게 좋아했던 참치김밥은 좀 느끼해서, 그렇게 좋아했던 카페모카는 너무 달고 속이 더부룩해져서 잘 먹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언제든 먹을 수 있게 되었는데 오히려 먹고 싶지 않아 졌다는 게 참 웃기다.
다들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갖고 싶어 하면서 사는 게 아닐까. 그리고 막상 그걸 가지게 되면 '이걸 내가 왜 그렇게 갖고 싶어 했지?' 하면서. 그냥 남들은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현재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어서, 그래서 갖고 싶어 했던 게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예전에 비해 가질 수 있게 된 게 정말 많은데 나는 이제 진심으로 갖고 싶은 게 없다. 화장을 거의 하지 않으니 비싼 화장품도 필요 없고, 옷은 항상 비슷한 편한 옷만 입는다. 이젠 옷 쇼핑하는 것조차도 귀찮다. 미용실은 1년에 한 번씩 머리 자르러만 간다. 오랫동안 복싱하느라 피아노 치느라 네일아트는 내 생애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가방은 에코백 하나면 해질 때까지 몇 년씩 충분하다. 자차가 있긴 하지만 당장 폐차해도 이상하지 않을 오래된 차다. 딱 하나 물질적으로 갖고 싶은 건 '집' 하나뿐이다. 그 외에는 갖고 싶은 게 없다.
대신에, 나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지금은 수영을 배우고 있고, 올 가을쯤엔 프리다이빙을 배워볼 예정이다. 작년에 화훼장식기능사 자격증을 땄는데 올해는 꽃다발, 꽃바구니 만드는 법을 더 배워보려 한다. 캘리그래피나 드로잉도 배우고 싶다고 계속 생각 중인데, 이것도 언젠간 배우고 있겠지 싶다. 작년에 4개월 정도 제과제빵학원에서 디저트 만드는 것도 배웠는데 제과제빵을 좀 더 깊이 있게 배워보고 싶다. 요즘엔 스페인어에 꽂혀서 매일 출근 전 30분~1시간씩 스페인어 인강을 보면서 공부하고 있다. 코로나 터지기 직전에 중남미 여행을 다녀오고 스페인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거의 4년이 다 돼 가는 이제야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했다. 피아노는 올해 말쯤이면 이제 그렇게 원하던 유명한 클래식곡들을 도전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 여름이 오기 전에 마라톤도 해야 한다!!
내가 할 줄 아는 걸 하나씩 늘려가는 게 너무 재밌다. 예전엔 못하던 운전도 할 수 있게 되었고, 수영도 할 수 있게 되었고, 베이킹도 할 수 있게 되었고, 식물들을 잘 키우는 법도 알게 되었다. 좀 더 있으면 이제 기초적인 스페인어 회화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다음에 또 뭘 배워볼까 하는 행복한 고민을 한다.
물건을 사는데 돈을 쓰는 대신, 새로운 것들을 배우는데 돈을 쓰면 할 줄 아는 게 많아지고 값진 경험도 남는다. 물건을 사면 어떤 것이든 결국 낡아져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지만, 내가 배운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까먹을지라도) 나의 머릿속에 몸속에 어렴풋이 남아있어 언제라도 써먹을 수 있다.
이렇게 나는 돈을 벌어서 내 교육비(?)로 쓰는 중이다. (물론 저축과 투자도 한다.) 1인 가구인 나에게는 나를 잘 키우는 게 중요한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