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스쿠터여행에 대한 로망
혼자 스쿠터 타고 제주도를 여행하는 것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완전한 여름이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선선한 날씨를 즐기자는 생각으로 로망을 실현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이 들면 체력 이슈로 하기 힘들어질 것 같다는 생각도 한몫했다. 해외여행은 아니지만 여행 일정을 잡고 나니 또 매일 달력을 보면서 여행 날만 기다려졌다.
떠나기 며칠 전, 제주도에 이른 장마가 시작된다는 뉴스를 봤다. 하필 딱 장마 시즌을 맞춰서 예약을 하다니 아주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햇빛이 너무 쨍해서 뜨거운 것보단 차라리 흐리고 비 오는 게 낫지!"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 해도 잘 안 됐다. 렌터카를 예약했으면 그나마 괜찮았을 텐데 스쿠터를 예약한 터라 비 오는 날씨는 힘들게 뻔했다. 예약을 바꿀 수가 없어서 그냥 날씨 예보가 바뀌길 간절히 기도하면서 출발했다.
제주도의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를 기대한 내 바람을 비웃듯이, 여행 첫날부터 내가 마주한 건 어두운 회색 하늘, 추적추적 떨어지는 빗방울, 자욱한 안개였다. 게다가 날씨 때문인지 뭣 때문인지 제주도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끈지끈한 두통이 시작되었다. 점심 먹고 숙소 들어가서 쉬려고 해도 숙소 입실시간이 거의 4시라 들어가 쉬기도 애매했다. 금방 또 저녁 먹으러 나와야 하는 시간이므로. 어쨌든 대충 입실시간 맞춰 입실하고 잠시 누워서 휴식을 취했는데도 두통이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숙소에서 폰으로 날씨 예보를 계속 체크하고, 창밖으로 비가 오는지를 계속 체크했다. 비가 그친 걸 창밖으로 확인한 후에 내가 스쿠터 타고 나오자마자 또 비가 거세게 쏟아졌다. 처음엔 우비를 입었으나, 싼 우비라 별 효과도 없고 펄럭펄럭 거치적거려서 그냥 맞고 다녔다. 방수재질의 운동복 긴 바지에 바람막이를 입었으므로 그냥 비 맞고 타는 게 나았다. 그렇게 물에 젖은 생쥐 꼴을 하고 식당에 도착해 저녁을 먹었다. 내가 식당에 도착하고 난 후엔 또 비가 그쳤다. 그리고 밥을 다 먹고 나온 순간, 내가 밖에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또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3박 4일 일정 중에 첫째 날은 비가 계속 오다 말다 오다 말다 하면서 흐렸고, 둘째 날은 비가 많이 내렸고 안개도 엄청 심하게 껴서 앞이 잘 안 보였다. 셋째 날도 오전까지 비가 오다 오후에 차츰 맑아졌고, 마지막 날은 흐리다 좋다 했다. 날씨가 아주 다이내믹하게 바뀌어서 일기예보 확인하는 게 별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정말 다행인 건, 셋째 날 오후가 돼서야 그렇게 원하던 푸른 하늘, 푸른 바다, 시원한 바람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는 하늘이 맑아져서 그런지 밤하늘에 별들도 엄청 잘 보였다. 밤바다 산책하며 별구경하고 있으니 이틀간의 고생이 조금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첫날부터 이렇게 날씨가 좋았다면 금방 지겨워졌을 것 같기도 했다. 예쁜 풍경을 아예 한 번도 못 보고 가나 했는데, 이렇게 막판에 잠시라도 볼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신기하게도 여행 일정 내내 나를 괴롭혔던 두통은 서울에 오자마자 신기하게 싹 사라졌다. 다시 잔잔한 일상으로 돌아오니, 여행을 갔다 온 건지 꿈꾸고 온 건지 약간 몽롱한 느낌이었다. 그저 스쿠터에 혼자 부딪혀 멍든 자국과 너무 오래 걸어 다녀서 탱탱볼처럼 부운 종아리, 발가락 사이에 물집, 온몸의 뻐근함을 보아하니 여행 다녀온 게 꿈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뚜벅이 여행도 아니고 스쿠터 여행을 했는데도 하루에 최소 2만 보 이상씩 걸었다. 셋째 날은 거의 3만 보까지 걸었다. 유명한 관광지는 거의 안 갔는데도 그랬다. 계속되는 두통으로 정신없는 상태로 다녀서 그런지 왜 걸음수가 많은지 잘 모르겠다.
스쿠터로 제주여행을 하려면 캐리어를 가져갈 수 없으므로 짐을 최대한 줄여 백팩 하나에 다 담아야 한다. 제주도 여행 갈 땐 항상 예쁜 옷들만 잔뜩 챙겨갔었는데 이번엔 바람막이, 운동복으로 입는 반팔 티, 운동복 바지만 챙겨갔다. 그것도 다 검은색, 네이비색으로. 다행히 챙겨간 옷들은 비 오는 날 스쿠터 타기에 맞춤 복장이었다. 그리고 긴 팔, 긴 바지, 장갑, 운동화, 캡 모자, 선글라스, 넥워머는 필수품이었다. 스쿠터 타기 전에 넥워머 하고, 선글라스 끼고, 헬멧 쓰고, 장갑 끼고 나서 시동을 건다. 목적지에 내린 후엔 시동 끄고, 장갑 벗고, 헬멧 벗어서 트렁크에 넣고, 트렁크에서 꺼낸 캡 모자 쓰고, 선글라스 벗고, 넥워머 벗고 해야 한다. 이 과정을 하루에 3~4번 반복하는 게 생각보다 매우 귀찮았다. 그리고 스쿠터 1시간 운전하고 느끼는 피로는 차 운전 2시간 운전하고 느끼는 피로랑 비슷한 것 같았다. 길어도 1시간 운전하고 나면 잠시 쉬어줘야 했다.
멋지게 스쿠터 타고 제주도 해안 도로를 달리는 내 모습을 상상했었다. 현실은 땀, 빗물, 바닷바람에 푹 절여진 꾀죄죄한 몰골과 피로한 몸뚱이로 힘겹게 스쿠터를 타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 헬멧과 땀 때문에 떡져있는 머리, 바람에 휘날려서 얼굴에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붙어있고, 얼굴엔 가끔 검은깨 같은 날벌레들이 붙어있었다. 그러니 내려서 스쿠터 사이드미러로 내 얼굴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로망과 현실은 많이 다르지만, 계속 생각만 해보는 것보단 직접 해보는 게 역시 좋은 것 같다.
날씨가 너무 안 도와주긴 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도 나름 큰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다만, 로망은 한번 실현했으니 족하다. 다음에 또 스쿠터나 바이크를 타려거든 몇 시간 또는 하루 정도만 빌려 타고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