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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쓴 Nov 01. 2019

백수생활 5년 만에 직업이 생겼다.

  2013년 2월에 학사 졸업을 했다. 2015년 2월에 석사 졸업을 했다. 대학원 마지막 학기엔 서류전형 합격률이 꽤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최종 합격을 한 곳은 없었다. 좀만 더 하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다음 상반기에도 모두 떨어졌다. 상반기엔 공고가 별로 없으니까 하반기에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 하반기에도 모두 떨어졌다. 그렇게 똑같은 상황이 몇 년이 이어졌고 어느새 서른이 넘었다.     

 

  작년에는 정말 모든 게 다 암울했다. 남들은 다 취업하고 결혼하고 잘 사는 것 같았다. 졸업하고 백수 신분으로 취업준비를 하면서 계속 중고등학생들 영어 과외를 했다. 한 달에 많게는 500 정도 벌었다.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거의 없었다. 과외로 번 돈은 고스란히 다 한국장학재단에 갖다 바쳤다. 석사까지 하느라 학자금 대출이 꽤 많았다. 대학 때는 알바나 과외를 하면서도 성적장학금과 취업에 필요한 각종 자격증을 따려고 거의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대학원 때는 새벽 첫차를 타고 연구실에 도착해서 공부를 했던 적도 많았다. 졸업 후 백수 시절엔 과외를 많게는 10명 넘게 했으니 한 집 수업 마치고 다음 집 수업 가려고 뛰어다녔다. 밥 먹을 시간이 없어서 그냥 길에 서서 김밥을 먹은 적도 많았다. 내 나이 서른하나였던 2018년, 모은 돈은커녕 학자금 대출은 아직도 남아있었고, 직장경력은 전혀 없고,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백수였다.     



  

  그렇게 열심히 산 결과가 서른 넘은 백수라니. 너무 억울했다. 직장경력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으니 먹고살 길이 막막했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나마 내가 좀 할 줄 아는 건 공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해보고 싶은 시험을 알아보다 눈에 띈 것이 노무사였다. 알아보니 신림동 고시촌 학원비와 생활비는 어마어마했다. 학원비에 책값에 생활비에. 최대한 돈을 줄이기 위해 졸업한 대학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했다. 남들이 듣다 남은 자투리 인강만 싸게 사서 봤다. 공부한 과정을 자세히 쓰지는 않으려 한다. 그저 길게만 느껴진 시간이었다.


  논술형 시험이라 교수님들이 한 명 한 명 직접 채점을 하기 때문에 시험 마치고도 결과가 나오기까지 두 달이나 걸린다. 상대평가라 합격여부를 예측하기도 어렵다. 시험을 보고 난 후, 합격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불합격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랜 취준으로 불합격에 익숙해서인지 불합격할 거란 생각을 더 많이 했다. 어찌어찌 시간은 또 흘러 합격자 발표 날이 왔다.     




  ‘합격’이란 두 글자가 내 두 눈앞에 있었을 때, 첫 느낌은 정말 신기하게도 ‘허탈함’이었다. 갖은 맘고생하던 20대 때 ‘합격’이라는 두 글자를 볼 수 있었다면 아마 뛸 듯이 기뻐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어차피 앞으로 또 다른 종류의 힘든 일들이 있을 거란 걸. 저 문턱만 넘으면 꽃길만 펼쳐져있을 거란 20대 때의 생각이 정말 순진한 허상이었음을 이젠 안다. 그리고 그걸 빨리 알아 버렸다는 것이 슬프다. 좋은 결과를 얻고서도 기뻐할 수만은 없게 되어버렸으니까.     


  합격 소식을 전하는 내게 사람들은 ‘네가 열심히 했으니까 합격한 거지. 축하해’라 했다. 나는 열심히 했으니까 잘 됐다.’는 말을 너무너무 싫어한다. 한창 같이 취업 때문에 힘들어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때 취업에 합격한 또 다른 친구(A) 얘기가 나왔다. 그 힘들어하던 친구가 말했다. “A는 정말 열심히 했으니까...” 내가 물었다. “그럼 너는 열심히 안 했어? 나는? 나는 열심히 안 했어?” 그 친구도 나도 다 열심히 했다. 결과는 노력뿐 아니라 더 많은 걸 필요로 했다.      


  같이 합격한 사람들을 만나보니 다들 합격 발표가 나기 전까지 ‘합격만 시켜주면 정말 착하게 살겠다.’며 기도했었다고 한다. 나도 기도를 했었다. 착하게 살겠다는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았다. 나는 별로 착한 사람은 아니니까. 나는 합격하더라도 절대 내 노력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걸 잊지 않겠다.’고 기도했다. 이 약속은 꼭 지키려 한다.      


  나이 먹고 결혼할 생각은 안 하고 또 공부를 하겠다는 철없는 딸내미를 지원해준 부모님이 있었고, 공부한다고 연락 한번 안 한 나에게 내 생일날 기프티콘과 축하 메시지를 보내준 친구들이 있었고, 징징대는 소리 하며 전화해도 토닥토닥 잘 받아준 친구들이 있었다. 공부하면서 항상 혼자 가던 밥집에서 늘 반찬을 잘 챙겨주시던 아주머니 생각도 난다. 시험 당일 운도 좋았다. 공부할 때 소리에 민감한 나이기에 걱정이 되었었는데, 다행히 감독관이나 주변에 앉은 사람들 중에 신경 쓰이게 소음을 내는 사람들이 없었다. 맨 앞자리이면 부담스러울 것 같았는데 다행히 적당한 창가 쪽 중간 자리였다. 여러 가지 상황과 좋은 사람들과 운이 따라줬다. 절대 내 노력만으로 합격을 한 게 아니었다.     



   

  조금 슬픈 게 한 가지 더 있다. 사람들에게 나는 이제 백수가 아닌 노무사로 보일 거라는 사실이다. 올해 몇 가지 모임들 같을 델 나가면서 백수라고 말하는 게 사실 좋았다. 직업 얘기를 하면 그 직업과 연관시켜 그 사람을 바라보게 되니까. 나는 직업으로 정의되지 않는 사람이고 싶었다. 나는 아마도 앞으로 또 열심히 노무사 일을 할 것이다. 하지만 예전처럼 한 가지 목표만 보고 미친 듯이 달려가진 않을 것이다. 앞으로는 한동안 노무사로서 일을 하겠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운동과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를 계속할 것이다. 앞으로도 좋아서 하는 일을 더 많이 만들 것이다.  직업으로 기억되는 사람보다 '좋아서 하는 일이 많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서.     





두 달간 휴재를 해야 했던 건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시험 준비가 저에겐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이제 하고 싶은 일도 해야겠지요.

올해까진 시간이 있어서 12월에 미국과 남미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글 쓸게 많아진 건 좋네요ㅎㅎ

항상 잘 읽어주시는 구독자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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