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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쓴 Feb 16. 2021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 이제 하지 않겠습니다.


  문득 내가 고등학생 때 등굣길 버스 안에서 한 장면이 머릿속에 스쳤다. 그날 무슨 날이었는지 나는 책을 한가득 낑낑대며 들고 학교로 가는 만원 버스에 탔다. 교복 입은 학생들과 출근하는 직장인들로 가득 찬 버스 안에서 나는 무거운 책들이 든 비닐봉지를 손으로 바들바들 들고 앞좌석에 손잡이를 잡고 겨우 서 있었다. 그때 바로 내가 서있는 앞자리에 앉으신 어떤 남자분이 책이 너무 무거워 보였는지 들어주겠다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아니에요. 괜찮아요." 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분은 멋쩍었는지 내 짐에 뻗었던 손을 내리며 그냥 눈을 감고 주무시는 듯했다. 그렇게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약 30분 동안 나는 그 무거운 짐을 들고 사람들 틈에 끼여 땀을 뻘뻘 흘리며 서있었다. 버스에서 내리고 나서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냥 들어달라고 할걸.."




  나는 "괜찮다."는 말이 입에 배어있는 사람이었다. 그때도 지금까지도.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기 싫어서, 부담주기 싫어서, 분위기 안 좋게 만들기 싫어서, 안 좋은 말 하기 싫어서, 괜찮지 않은데도 내 입에선 항상 괜찮다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도, 분명 잘못은 그 사람에게 있는 데도 나는 또 괜찮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다고 했다.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그럴수록 내 마음속은 긁히고, 찢기고, 짓눌리고 피가 났다. 괜찮다는 나의 말 한마디에 돌아서버린 사람에게 내 아픈 마음이 보일 리가 없었다. 나도 몰랐다. 그렇게까지 내 마음이 아픈 줄 몰랐다. 괜찮다는 내 말에 괜찮겠지 하고 생각한 사람처럼 나도 내가 괜찮은 줄 알았다. 사실 나는 하나도 괜찮지가 않았다.


  내가 상처 받는 게 싫으니까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만 잘하면, 나만 참으면, 내가 노력하면 다 잘 될 줄 알았다. 내가 노력하면 상대방도 노력해줄 거라고 착. 각. 했. 다. 내 배려를, 내 노력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결국 늘 상처 받는 건 나였다. 상처 주지 않으려 할수록 되려 내가 상처를 받았다.

 



  미안하다는 말이 이렇게 듣기 싫은 말인 줄 몰랐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는 이미 상처 난 내 마음을 다시 예전으로 되돌릴 수 없었다. 이미 구정물 웅덩이를 밟아서 내 옷에 다 튀게 해 놓고 나서야 미안하다고 한다. 실수니까 미안하니까 네가 이해해달라는 거다. 미안하다고 하면 나는 또 괜찮다고 해야 할 것 같아 미안하단 말이 듣기 싫다. 괜찮다고 하고 싶지 않다. 미안할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구정물 웅덩이를 밟기 전에 그 옆에 서 있던 나를 생각했더라면, 내가 어떤 상처를 받을지 단 한 번이라도 생각했더라면 그렇지 못할 행동이었다. 내 마음을 갈기갈기 짓눌러 놓고, 고작 한다는 건 그제야 "미안해"라는 세 마디뿐이었다.


  더 많이 미안해했으면 좋겠다. 너무너무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했으면 좋겠다. 그 사람도 내 마음이 아픈 거에 반에 반에 반이라도 아파했으면 좋겠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괜찮지 않은데도 괜찮다는 말을 하지 않겠다. 하고 싶은 말을 혼자 꾹꾹 삼키지 않겠다. 내 입장을, 내 감정을, 내 기분을 배려하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들 앞에서 괜찮은 척하는 바보가 되지 않겠다. 내가 이해해주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 앞에서 이해해주는 건 당연한 게 아니라고 말하겠다. 기분 나쁜 행동과 말을 하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겠다. 나는 너의 행동에 화가 났다고. 너 때문에 내가 왜 힘들어해야 하냐고. 왜 나 혼자 다 이해해고 넘어가야 하냐고. 나는 하나도 괜찮지가 않다고. 그동안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척하는 바보 때문에 고생한 내 마음을 이제 내가 지켜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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