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는 단어는 몇개일까요
천천히 오가는 대화 속에
남는 단어는 몇 개일까요
_멜로가 체질 ost 중
오늘도 점심을 누군가와 먹었고, 대화를 했다.
어제도 커피를 누군가와 마셨고, 대화를 했다.
그제도 미팅을 누군가와 했었고, 당연히 대화를, 그것도 많이 했다.
그런데 이 중에 남는 단어는 과연 몇 개인가.
무. 없을 무.
대화가 없었던 건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근데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 게 없다는 건
오고가는 그 대화들 속에 내 진심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이 모든 걸 소화해서 하나하나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총기와 에너지가 다 떨어져 버린 걸까.
생명력 넘치는 누군가의 눈엔 꽤나 흥미로워 보일 수도 있는 나의 일상에서, 나의 대화에서,
정작 당사자인 난 아무런 감정 소용돌이나 심리적 지각변동을 느끼지 못한지 꽤 됐다.
무. 없을무.
무덤. 무덤덤.
예를 들면 지난 24시간 동안 있었던 이런 일들이다.
#1.
일요일 낮.
엄마 아빠가 일본 자유여행을 다녀오던 날, 공항에 픽업을 나갔다.
이 짧은 한 줄엔 많은 킬포가 있는데
엄마 아빠 둘만의 ‘자유여행’은 수십 년 만이었고,
딸로서 내가 용돈이 아닌 ’노동력‘을 보탠 건 입사 10여 년만 처음이었고,
가난한 유학생 시절, 일본 와세다 대학까지 붙어놓고 아빠를 잘못(?)만나 홀랑 시집 가버린 엄마의 일본 재방문은 사십 년 만이었다.
그런 많은 사연을 싣고 돌아오는 차는 이미 대화 과적 차량.
‘역시 일본 사람들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음식을 넉넉하게 내주는 법이 없다, 아빠가 지도 보는 실력이 예전만 못하다, 그럼에도 료칸의 온천물에 목욕했더니 피부가 뽀실뽀실하다’ 등.
평소 같으면
세상에, 40년 만에 살던 곳을 다시 가 본 기분이란 어떨까 그것도 외국을, 패키지도 아니고 자유여행을 어르신 둘이 이렇게 무사히 다녀온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것도 외국을, 내 트래블카드 어플에선 알람이 계속 울리던데 대체 얼마를 쓰신 걸까^-^ 등등 다양한 궁금증과 뿌듯함과 기쁨이 한데 섞인 많은 감정들이 스쳤을 테지만
졸렸다.
피곤하고 졸렸다.
대화에 남는 단어는 없고, 그저 내일 다시 출근이란 생각에 마음이 울적했다.
나란 나쁜 딸년.
#2.
일요일 저녁.
엄빠를 집에다 모셔다드리곤 부랴부랴 꽃을 사들곤 콘서트장으로 향했다.
이 짧은 한 줄에도 많은 킬포가 있는데,
이 과정에서 주말, 차 속에만 갇혀 4시간을 보냈고
꽃집이 모두 문을 닫아 무려 ‘무인 계산대’로 운영되는 냉혈한 꽃집을 찾아낸 나 스스로가 그저 대견했으며
무려 그 무인계산대 앞에서 손 편지를 쓰는 인간미 넘치는 휴머니즘 신공을 발휘한데다
그렇게 찾아간 콘서트장이란 업무의 연장선, 즉 일로써 찾아간 터라 객석 위치는 모르겠고 꽃의 주인을 찾아 대기실로 먼저 향했다는 거다.
‘아유 뭘 이런 데까지 찾아주시고 감사합니다’
‘아유 무슨 소리를요. 당연히 와야죠. 너무 축하드립니다’
‘아유 뭘 주말까지 시간을 내주시고 감사합니다’
‘아유 무슨 소리를요. 당연히 와야죠. 제가 감사드립니다’
핑퐁 같은 쉴 새 없는 반복 랠리의 향연. 이런 대화란 자로고 조금의 마도 뜨면 안된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걸 칭찬해도 부족하다.
평소 같으면
세상에, 일하면서 공짜로 공연도 보고, 남들은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 보는 아티스트들 대기실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고, 알찬 문화생활로 이 주말이 얼마나 풍성한가^-^ 등등 도파민으로 충만해졌겠지만
추웠다.
뜨거운 공연장 열기보다 더 한 에어컨 바람에 춥고, 어쩐 일인지 맘은 더 추웠다.
대화에 남는 단어는 없고, 이렇게 내 주말이 다 지나가 버렸다는 생각에 씁쓸해졌다.
나란 나쁜 피디나부랭이.
그렇게 속절없이 또 떠오른 해.
#3.
월요일 낮.
오랜만에 동기들과 점심 약속이 있었다.
이 짧은 한 줄에도 많은 킬포가 있는데,
모두 다른 직군인지라 네 명이서 이 약속 날짜를 잡는 데만 2달이 걸렸고
뭐 먹지 어디가지로 고민하다 결국 고른 건, 빈 노조 사무실에서 배달을 시켜 먹는 것이였으며
웬일로 비싼 양식집에서 파스타와 라자냐, 미트볼을 시키나 했더니 결국 몰아주기 게임에서 져서 14만 원은 내 주머니에서 나갔다
“솔직히 말해. 나 오기 전에 다 짰지?”
“에이, 우리가 초딩이냐?”
“그럼 오빠가 직딩이냐??? 이거 노조 일한다고 아주 근무시간 틈틈이 이 편한 흔들의자며 고급 스피커며 아주 월급 받으면서 신났어 아주???”
평소 같으면
세상에, 우리 진짜 직장인들 안같고 대학 동아리방 같다, 낭만 있써 낭만 있써, 우리 신입사원 때 연수원에서도 이렇게 놀았었는데 시간 참 빠르다, 그래 점심이라도 이렇게 맘 편하게 먹어야 또 일할 힘 나고 하는 거지^-^ 등등 하며 깔깔깔깔 낄낄낄낄 웃어대다 잠깐 현실을 잊을 뻔도 하였겠지만
지쳤다.
'이번 주도 일이 많아, 점점 더 보람이 없어져, 사는 게 다 그런 거지-'의 동어반복.
대화에 남는 단어는 없고, 출근한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으면서 퇴근하고 싶단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나란 회색빛 인간.
뭐 예를 들자면 지난 24시간 동안 있었던 이런 일들이 있었다는 거다.
근데, 점점 더 나빠지고, 점점 더 회색빛이 되어간다.
더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그 안에서 더 복잡 미묘한 수많은 감정들이 오고 감에도
난 되려 매사에 둔해져 버렸다.
둔해져 버리다 못해
겉도는 대화들을 소화 못해 살이 찌고, 그 살을 덮으려 털을 찌우고,
더 속을 알 수 없게 뭉그적 뭉그적.
대체 오늘 남는 대화는 뭐가 있었니.
아니, 남과의 대화보다
어쩌면 나와의 대화가 먼저 잘되지 않고 있는 것 같은데.
나, 요즘 나랑 사이가 좀 안좋은 것 같은데.
너 요즘 어때, 괜찮아?
지낼 만한거야? 그래?
…
답이 오질 않네. 어째.
천천히 오가는 대화 속에
남는 단어는 몇 개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