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운데가 텅 빈 것이, 꼭 내 인생 같노라고.
베이글을 보며 생각한다. 가운데가 텅 빈 것이, 꼭 내 인생 같노라고.
나는 확신의 빵순이다.
빵을 너무 좋아해서 하루 한 끼는 빵으로 때울 때가 많고, 밥을 든든히 먹은 후에도 꼭 뒤돌아서면 달달한 빵 한 조각이 땡긴다. 일종의 탄수화물 중독인데 빵을 먹어야 비로소 배가, 아니 마음이 든든해지는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해서 똘똘하고 바지런한 요즘 MZ들처럼 맛있는 빵, 새로운 빵을 찾아 빵지순례를 다니는 힙한 고수의 경지에는 또 이르지 못하였으니, 기껏 해봐야 제일 많이 먹는 빵은 회사 로비 카페에서 파는 빵이고, 두 번째는 스타벅스에서 커피와 함께 집어 드는 빵 정도다. 빵 좀 한다는 순례자들이라면 다들 다녀왔을 법한 <런던베이글>의 베이글은 업무차 선물을 받아서, <성심당>의 튀김소보로는 대전 본가에 다녀온 후배가 던져줘서 맛만 본 수준이다. 게다가 막입(?)인지라 파리바게트 소보로(보통)와 파리크로아상 소보로(고오급)의 맛의 차이를 크게 알아채지도 못하고, 비싼 몸 되시는 호텔베이커리의 연말 케이크는 선물용으로 ‘구매’만 해봤을 뿐 맛은 보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진지하게 한 분야를 파고드는 덕후 기질 또한 없으니, 베이커리 자격증을 따거나 원데이 클래스를 등록해 보는 건 남 얘기로만 느껴진다. (회사 파업 때 할 일이 없어 홍대 제빵 학원에 전화해봤다가 필기 시험이 있다는 얘길 듣고 바로 포기했다.)
결국 나에게 빵이란,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 후에 홀린듯이 찾게되는 백화점 지하 빵빵한 베이커리 매장에서 느껴지는 고소한 여유와 해방감 정도랄까. 인생 내 맘대로 되는 것 하나 없지만, 그곳에서만큼은 돈 걱정 안 하고 내 맘대로 마구 골라 담아 누릴 수 있는 사소하고 하찮은 포만감. 진짜 빵부스러기 같은 내 인생의 유일한 취미이자 도피처.
하지만 이런 내 인생의 유일한 낙에 빨간불이 들어왔으니 바로 늘어나는 몸무게와 높아진 혈당수치다. 이번 겨울, 처음으로 인생 최고치였던 고3 때 몸무게를 넘어섰고 지난 건강검진 때 공복혈당이 세 자릿수를 기록하며 모든 숫자들이 ‘빵 좀 그만 처먹어’를 외치는 거다. 와. 아직 한창 젊은데 벌써부터 당뇨를 의식하고 살아야 한다니. 아,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숫자 추가. 점점 비싸지는 베이커리 물가도 한몫한다. 뭔 빵이 그리 비싼지 손바닥보다도 작은 조각 케이크 하나에 8-9000원이라니. 이런 말세가.
이런 이유들로 이젠 유일한 내 삶의 이유이자 종교활동이었던 빵이 곧 죄책감이 되어버렸다.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화가 사르르 풀리고, 잠시나마 충만해지는 것 같았던 내 일상의 조각들이 결국 혈당 스파이크의 결과였다니. 내가 술을 해, 담배를 해. 빵이라도 해야 살지. 근데 그마저 줄여야 한다니 대체 이 노잼 인생에 더 이상 무슨 낙으로 산단 말인가.
줄여야 한다는 걸, 대체재를 찾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오늘도 늦은 출근길에 커피에 베이글을 하나 사갖고 사무실로 올라간다. 사실 식습관은 그 사람의 삶의 루틴이자 내가 먹는 것이 곧 나인 것을, 이게 어찌 쉽게 한순간에 바뀌겠는가. 왜 아빠가 나의 초등학교 입학에, 중학교 입학, 고등학교 졸업, 대학 입학에 맞춰 금연 선언을 하고도 매번 실패했는지 이해가 가는 시점이다. 끊거나 줄여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그러고 싶지 않은 심보. 그래도 맛있는 걸 어떡해. 계속 생각나는 걸 어떡해. 내일 당장 죽는 거 아니면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야지 뭘.
아무튼.
점심시간이 다 되어 고요한 사무실에 출근한 난 한 손으론 가방에서 식은 베이글과 크림치즈, 일회용 나이프가 든 봉투를 꺼내며 한 손으론 노트북 전원 버튼을 누르고 하루 업무를 시작한다. PD라는 직업의 가장 큰 장점이 무어냐 물으면, 딴 건 다 모르겠고 아침 9시에 출근 안 해도 되는 자유로운 근태다. 점심을 먹으러 출근하거나, (공식적인)점심시간 쯔음 주섬주섬 출근 도장 찍는 (비공식적)나태지옥 직장인. 그리고서 회의 들어가기 전에 눈으론 자료를 보고, 입으론 밥을 먹는 멀티 신공을 발휘하며 세상 바쁜 척. 이럴 거면 좀 일찍 출근해서 하나씩 하지 말이다.
아무튼.
자리에 앉아 본격적으로 오늘의 첫 끼를 시작해 본다. 탕종 베이글. 쫄깃한 식감이 일품이라 쓰여 있길래 자르지 않고 그냥 통으로 먹어보련다. 한 입 해볼까- 하는 찰나. 뒤에서 부장님이 부른다.
“어이, 언제 왔어. 점약 없니? **본부장이랑 간장게장 먹으려는데 같이 갈래?”
“네??? 어휴, 아뇨. 저흰 피디들끼리 다음 달에 미팅 잡아 뒀습니다. 맛있게 드시고 오세요^-^”
휴우. 하마터면 2시간을 웃다 올 뻔했네. 자연스러웠다. 이래서 11시 반 전에 애매하게 출근하면 안 된다니까. 심지어 난 간장게장 먹지도 않는데. 휴. 베이글이 식어간다. 이제 좀 먹어볼까.
“카톡, 카톡”
불길함에 PC 카톡을 열어보니 빨간 밭 천지다.
팀 단체방엔 당장 다음 녹화와 관련된 이슈들이 쏟아진다. ‘가사 심의는 어떻게 할까요, 출연자 의상 컨펌이요, 리허설 순서 이렇게 가도 될까요….’ 당장 답해야, 누군가는 또 일을 진행한다. 빠르게 빠르게 회신.
그 밑엔 자동차보험 만기 알림 카톡. 세상에 또 1년이 지났구나. 연장해야지. 근데 난 늘 무사고인데 왜 해마다 이 보험료는 줄어들질 않을까.
또 그 밑엔 은행 대출 모바일연장 카톡. 와 세상 좋아졌네. 이게 전화로 안 오고 이젠 카톡으로 오는구나. 무서운 세상. 점점 쉽고 간편해진다. 나중엔 내 일도 다 AI가 하겠지. 그땐 뭐 해 먹고 사나. 그래도 일단 대출 연장은 해야지 지금…
“카톡”
(회원님, 오늘 운동 제시간에 가능하실까요?)
아. 맞다. 오늘 회의 늦게 끝나는 날이라 못 갈 텐데. 깜빡했네. 하아…
(죄송해요 선생님ㅠ 전 오늘도 틀렸습니다… 미리 말씀 못 드려 죄송합니다ㅠㅠ 차감… 안 해주실 거죠?ㅠㅠ)
“카톡”
(회의 전 커피 주문 받습니다!!)
아 나 방금 아아 먹었는데 이번엔 라떼를 먹어볼까…
노트북 앞에서 거북이 목을 쑥 내밀고는 눈앞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이들과 눈 깜빡할 사이에 많은 일들을 손끝으로 해치운다. 답할 거 다 했고, 급한 것도 처리했고, 마침 생각난 내일 점약 장소도 예약했고. 운동은… 일단 모르겠고 담주엔 꼭 가야지. 근데 운동이 문제가 아니라 일단 먹는 걸 덜 먹어야 살이 빠질 텐데. 아 빵! 나 빵 먹으려 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우스 옆엔 싸늘하게 식은 베이글이 덩그러니 짜부러져 놓여있다. 에잇. 이럴 줄 알았으면 데워 오지라도 말걸. 통통했던 베이글이 뭔가 한층 쭈그러들었네. 심지어 딱딱해졌잖아? 휴…
진열장에선 다른 빵, 케이크, 샌드위치들과 함께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비주얼로 날 홀려놓곤. 정작 데리고 오니 세상 하찮아졌네. 이제 곧 회의 들어갈 시간인데. 그래도 먹을까. 배고플 텐데. 말까. 뭐 발라먹기도 귀찮은데.
한 손으로 들어본다.
그리곤 문득, 베이글을 보며 생각한다.
가운데가 텅 빈 것이, 꼭 내 인생 같노라고.
멀리서 보면 주변부가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것이 꽤나 그럴듯해 보이지만,
정작 가운데가 텅 비었다.
이래저래 욕심만 많아 흩어놓은 여러 가지 일들이 있지만, 정작 그것들의 구심점이 되어주는 명확한 목표가 없다.
직업 특성상 밖에선 웃기도 많이 웃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결과물이 재밌고 보람찰 때도 있지만 정작 집에 돌아가면 늘 기가 쪽 빨려 피곤하고, 막막하고, 씁쓸하다.
남들이 보기엔 딱히 문제없는 인생 같아 보이지만, 가운데 선 나 스스로는 늘 무기력과 허무, 불안과 싸우느라 지칠 대로 지쳤다.
터엉.
인생에 코어가 없네.
베이글이네 베이글. 내 인생 베이글.
똑같이 가운데 구멍이 뚫렸어도, 도넛과는 차원이 다르다.
도넛은 화려한 색깔과, 초콜릿 코팅과, 잔뜩 올린 크림 등으로 보기만 해도 초반부터 시선을 사로잡는 데다 맛까지 달콤해서 고자극 도파민을 뿜어내지만,
베이글은 색깔도 모양도 터엉. 맛도 혼자 가지고는 역부족이다. 크림치즈든 잼이든 뭐든 곁들여 줘야 먹을만하지, 하나만 씹어가지고는 성에 차질 않는다. 그래서 요새 유행하는 베이글들은 그렇게 안에다 무화과를 심고, 대파 크림을 잔뜩 넣고, 치즈 가루를 붓고 하질 않나. 그 아이들의 공통점은 그냥 가운데가 뚫렸다는 것뿐이다. 나처럼. 터엉.
봄이 다가오다 보니, 새로운 계절이 시작된다는 희망보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더 고민하게 되는 요즘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계속 해도 괜찮겠어? 하던 대로 해도 충분해? 이게 맞아? 싶은 자문들.
목표가 애매하면 인생도 애매해진다던데.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정작 내가 무엇을 향해 달려가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결과가 무엇인지 나조차도 모르겠는 하루하루의 연속이다. 일분일초의 이 작은 빵부스러기 같은 시간들이 모여 내가 베이글이 되고 싶은지, 도넛이 되고 싶은지, 식빵이 되고 싶은지 그 지향점은 정하고 가야 하는데 말이다. 오래 살진 않아도 건강하게 살고 싶다면서 매일 운동가는 건 미루고 취소하기 일쑤고, PD로 정년퇴직하고 싶진 않다면서 매일 같이 당주 방송에만 목메느라 퇴근 후엔 자기 계발은 커녕 방전이다. 열심히 살아서 쓸데없는 주변 부피만 키워온 느낌.
인생의 코어.
중심을 뙇 잡고. 채워야 할 때다.
도넛처럼 한눈에 확 들어오지도, 중독성이 강하지도 않은 그냥 식사 대용 베이글 같은 내 인생.
나라는 상품 가치를 높이기 위해 크림치즈든 뭘 곁들이든, 커피랑 같이 세트로 묶어 팔든, 아님 하다못해 가운데를 채워 탈바꿈하든. 더 맛있게 더 잘 팔릴 베이글을 위한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
그래도 희망적인(?) 건,
어린 시절 그 많던 <던킨도너츠>도 많이 없어졌고,
대학 시절 문화충격이었던 <크리스피크림 도넛>도 많이 없어졌고,
최근 떠오른 <노티드 도넛>도 예전만 못하단 거다.
색깔도 모양도 맛도 ‘무’지만, 베이글은 결코 지지 않는다. 터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