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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를 잘못 뽑았네

_이번 인생 게임

by 토스트잼



“그래서, 이제 누님으로 불러도 되는 거죠? 아잇, 이거 마심 이제 누나동생 하는 거지 뭐!! 하하하하핫”

“와, 대단하다 얘. 아니 얘라 그럼 안 되지. 저기요 팀장님, 우리 8명이서 4시간을 떠들었는데 기억나는 게 비타민마늘주사랑 너밖에 없어요... 진짜 징하다”


그렇게, 금주 약속을 한 나의 선배는 3일 만에 또 다시 술병을 얻었고, 없던 남동생도 얻었다.


엔터 관계자들과 함께 한 왁자지껄 저녁 술자리.

분위기가 좋았던 그날. 뭘 먹었는지, 정확하게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히 뇌리에 박힌 건 딱 2가지. 선배 말 따라 효과가 끝내준다는 ‘비타민마늘주사’와 ‘팀장님 A’의 캐릭터다.

저마다 술잔과 토크 주크박스를 돌리는 와중에도 유독 궁금해지고, 사뭇 집중이 되고, 어딘가 모를 친근감이 들면서 끝내 마지막까지 기억에 남는 딱 한 사람.

왠지 오늘 이 자리의 기억으로 나중에 저 사람한테는 더 밝게 인사할 수 있을 것 같고, 뭔가 내가 줄 수 있는 걸 더 호의적으로 베풀고 싶게 만드는… 뭐야, 나 가스라이팅 당한 건가!!!


대단하다.

저렇게 처음 만난 사람의 진입장벽을 단숨에 허물어버리는 침투력.

단순히 “인간적 매력”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 안 되는 끌림의 법칙.

원하는 걸 당장 얻어내든 안 얻어내든, 중요한 건 상대방이 나를 기억하게 만드는 능력이다.

외모든, 말투든, 유머 감각이든, 진정성이든.


동시에 두렵다.

나는 저분들에게 있어 어떤 PD로 기억될까.

아니, 기억이나 될까.

이 일을 하는 10년 내내 고민하고, 여전히 극복 못 한 숙제.

바로 “내 캐릭터는 무엇인가”에 대한 정체성.


캐릭터.

이건 드라마 속 주인공이나, 게임 속 플레이어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체 생활을 하는 학생들도,

사회생활을 하는 직장인들도,

다수 속에서 나를 어필해야만 살아남는 이 시대 모두가 고민해 봐야 할 문제다.

오죽하면 연예인들은 ‘부캐’를 만들어 활동 범위를 늘리냐 말이다.




이런 캐릭터에 대한 나의 고민은 신입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우르르 같이 입사한 동기들 중에서도 단연 먼저 튀는 아이와 아닌 아이가 있기 마련이니, 초반 캐릭터 세팅 값이 향후 회사 생활을 좌우한다.

반듯한 캐릭터의 유재석이 욕 한번 하면 ‘인성 논란’이 되지만, 욕쟁이 캐릭터의 박명수는 욕 두 번 해도 사람들이 “꺄르르”하며 한 번 더 해달라고 좋아하는 게 바로 캐릭터다.


그렇다면 나의 캐릭터는 무엇인가. (진지)

대문자 I 내향인에,

여자 PD,

신입이라는데 갤럭시 폰에 천지인 자판 쓰는 올드스쿨갬성에,

술도 못 마셔, 방송국놈들 필수인 순댓국도 못 먹어,

휴가 보내주니 간 곳은 템플스테이.
스트레스 해소법은 고작 떡볶이 먹기.

뱉는 말마다 노잼인데 또 쓸데없이 성실은 한 FM 스타일.

…쓰고 나니 진짜 한숨 나네. 이거… 어따 써먹지? 끙.

이런 나의 애매한 캐릭터에 주변인들도 한숨을 보탠다.


“언니, 안 그래도 나도 캐릭터 없어서 걱정인데 언니가 우리팀 와서 나 또 고민이네ㅋㅋㅋ”

라며 겹치는 캐릭터의 고만고만한 신입 병아리 둘이 편집실에서 작전 짜질 않나

(하지만 그 병아리는 퇴사해서 타사의 훌륭한 닭이 되었다)

“야. 넌 내 팀 온 이상 너의 그 니마이 캐릭터(**진지, 노잼의 뜻)는 내가 고쳐놓고 내보낸다. 이거슨 나의 미션이다.”

라며 당시 수염으로 캐릭터를 만든 그 남자 선배는 호기롭게 날 위로했다.

(하지만 내 수염이 다 자라기도 전에 그 선배는 이직해서 수염을 싹 밀었다)


그렇게 일 년, 또 일 년.

미처 제대로 된 캐릭터를 구축하기도 전에 몰려오는 일 쓰나미에 묻혀 하루하루의 숙제들을 해치우다 보니 슬슬 연차가 쌓이기 시작했다. 순간순간의 본캐대로 세상에 반응하며, 롤모델이나 이상형도 없이 무계획 무전략으로.


쩝, 캐릭터 잘못 뽑았네… 이번 인생 게임




다음날.

술병과 남동생을 동시에 얻은 그 선배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참고로 그 선배의 캐릭터는 샤넬이다. 예쁜데 부자다.)


“선배님, 나는요 그런 회식 자리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그분들처럼 막 재미있게 말도 못 하겠고, 그렇다고 내 개인적인 이야기도 딱히 할 게 없고. 어뜨케여???ㅠ”

“어떡하긴 뭘 어떡해. 무슨 말 할지 잘 모를 땐, 그냥 질문을 해. 시계를 차고 있으면 그 시계 예쁘다, 좋아 보인다, 얼마냐 물어봐 주고. 결혼했냐 물어봐서 했으면 아기 사진 보여달라고 귀엽다고 해주고. 그리고 누가 봐도 출연 문의하는 것 같으면 섭외를 하든 말든 상관없이 그냥 그냥 그 연예인은 뭘 잘하냐, 이번 곡 어느 게 제일 좋으냐 물어봐 주고 하면 되는 거야. 사람 중에 자기한테 관심 갖고 질문하는 거 싫어하는 사람 없어. 그렇게 질문하다 보면 ‘아 이 사람은 이런 캐릭터구나’ 알게 되고. 그럼 또 할 말이 더 많아지는 법이야.”

오호...!

질문을 해라. 이거 꽤나 맞는 말 같은데.

그래. 소개팅에 가서도 입 다물고 있음 안 되지. 질문을 해야 호감이 생기든 말든 하지.


“근데 ...선배님도 아시겠지만...저 되게 무색무취잖아요 ...나 빨리 이 팀에서 캐릭터 잡아야는데 어떡해요?...”

샤넬 선배가 샤넬 구두를 번쩍이며 다리를 꼬고, 샤넬 팔찌를 흔들며 팔짱을 끼곤 나를 빤히 바라본다.

“얘, 난 네가 캐릭터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 넌 되게 온화한 사람이야. PD들 중에 사이 안 틀어지고 누구와도 잘 지내는 사람 진짜 많지 않아. 사람들이 자기한테 따뜻하게 대하는 사람 싫어할 것 같아? 전혀.”


엇…

온.. 온화요…?

선밴님, 아직 저 이 팀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우리 덜 친해진 것 같아요.

저 매일 열받아서 반팔 입고 다니고, 입에선 불을 뿜고 다니는데 온화라뇨. 아무래도 절 너무 좋게 봐주시는 것 같습니다만?


근데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취업 준비생 시절. 고만고만한 애들끼리 서로 자기소개서를 돌려가며 상대방의 장점을 골라 심어주던 면접 준비 자리. 같은 조 사람들은 나의 장점을 당시 “편안함”이라 했다. 같이 있으면 불편하지 않고, 이 사람은 나를 해치지 않을 것 같다는 무해함이라나 뭐라나.


온화함. 편안함.

하. 맘에 들지 않아. 이건 그냥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맹탕이라는 거잖아.

온화하고 편안하면 사람들이 쉽게 본다구. 막 해도 되는 사람으로 안다구. 늘 2순위로 밀린다구!

차라리 빡센 캐릭터일지언정 ‘빙그레썅년’, ‘B 사감’ 정도는 되야 사람들이 뽝 긴장하고 나를 기억하지 않겠어? 똑같은 걸 부탁해도 “얘는 해주겠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저 사람한테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지?”하는 부탁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고 싶다고!!!

대체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걸까. 걍 이번 생 캐릭터를 잘못 뽑은 거 아닐까… 이번 판 로그아웃하고 새 캐릭터로 새 인생판 다시 시작하고 싶은데.

대체 남들 주목시키는 그런 포스는 어느 학원에 가야 배울 수 있는지, 그런 아우라는 어디 가서 살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천성에도 맞질 않고. 아무리 봐도 다시 태어나야 가능한 캐릭터 체인지다. 하는 수 없이 현생 캐릭터로 또 하루하루를 뿌셔 나갈 뿐이다. 스겜스겜.



나도 다음생엔 라이언으로



며칠 후, 새 출연자 미팅 자리.

출연자 A는 소문대로 누구보다 편안한 이미지에 심지어 착하고 반듯한 정석 그 잡채였다.

심지어 외모마저 너무 착하고 반듯해서 캐릭터에 비주얼까지 찰떡으로 붙어버리니 그사이에 치고 들어갈 여지가 없다.

뭐지. 얜 사람인가, 사기캐인가.

이 완벽함 뒤에 과연 흠잡을 일이나 있을까 싶었는데

잡았다. 그 흠.


착한 게 과해 다소 노잼이고, 반듯함이 과해 너무나 FM이다.

노잼에 FM… 온화하고 편안...

뭐야. 나 동족 혐오인가. 첫 만남에 내 치부를 그에게서 찾다니.

니 주제에 뭐라고! 저 말하는 인형 같은 완벽한 존재에 지적질이야.

얼굴이 꿀잼이고 목소리 자체가 FM 라디오 급인 것을!!!!


셀프 회초리질 이후, 예쁜 A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노잼에 FM… 아니(찰싹찰싹) 착하고 반듯한 그의 말 안엔, 단순히 “네,네”가 아닌

“이건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이렇게 해주시면 제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는 본인만이 메시지가 있다. 겸손하고 예의 바르게, 그러면서도 자기 생각을 똑 부러지게 이야기하는 침투력.


오호… 그래. 온화하고 편안하다는 건 물렁물렁하고 무색무취하다는 게 아니라

상대방에게 거부감없이 스며들어 자신만의 색깔을 침투시키는 거야. 저렇게 말하면 (아니 저 얼굴로 말하면) 누가 안 들어주고 싶겠어. 그렇게 그에게 온화하게 스며든다. 눈이 편안하고, 귀가 편안하다. 뭐지. 이 시몬스급 예쁨, 아니(찰싹찰싹) 착한 존재감은.


오늘도 또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통해 배운다.

그래서 오늘도 고민한다. 나란 존재에 대해서.

이번 생에 (어쩌다) 뽑은 이 캐릭터로 어떻게 하면 이 일을 더 온화하고 편안하게 잘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 전에 일단.

노잼에 FM인 너와 나. 우리 동족끼리 다음 촬영 먼저 재미있게 잘해보쟈. 누구보다 확실하게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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