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방의 앵무새
남편의 등. 규칙적인 숨소리가 얇은 이불을 오르내린다. 알람이 울리자 그는 습관처럼 팔을 뻗어 내 어깨를 감쌌다.
"잘 잤어?"
잠긴 목소리. 적당한 온기.
위화감은 그 매끈함에서 온다. 수천 번의 아침을 반복하며 마모된 조약돌 같은 인사다.
나는 생각한다. 이 남자는 지금 나의 안부가 궁금한 걸까, 아니면 오전 7시 침대라는 무대 위에서 '남편' 배역에게 할당된 대사를 뱉어낸 걸까.
"응, 당신은?"
내 입술도 멋대로 움직였다. 뇌를 거치지 않은 척수 반사. 입력값이 들어오면 정해진 출력값을 내놓는 자판기처럼, 내 혀는 '안부'라는 동전을 받고 '대답'이라는 캔커피를 덜컹, 떨어뜨렸다.
언어학자로서 평생 '의미'를 쫓았지만, 최근 나를 잠식한 건 존 설의 오래된 사고 실험이었다.
[중국어 방]
방 안의 사람은 중국어를 모른다. 그저 매뉴얼에 따라 한자를 조합해 문밖으로 내보낼 뿐이다. 하지만 밖에서 볼 때 그는 완벽한 중국어 구사자다.
나는 남편의 뺨에 닿은 내 입술을 의심한다.
우리 모두가 그 방 안에 갇힌 수감자라면. 우리가 평생 주고받은 '사랑', '위로', '약속'이 단어의 무게조차 모른 채 학습된 소리를 호르몬에 의해 흉내 낸 결과물에 불과하다면.
"오늘 늦을 것 같아. 먼저 자."
남편이 욕실로 사라졌다. 문장은 완벽했고,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나는 텅 빈 침대를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심장은 뛰지만, 그 박동이 생명 활동인지 기계적 펌프질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섯 살 이선은 나의 기쁨이자 공포였다. 아이의 언어 습득 속도는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주말 오후, 거실 바닥에 엎드린 이선이 검은색 크레파스를 짓이기고 있었다.
"엄마, 이 색깔은 아픈 밤이야."
설거지하던 손이 멈췄다. '아픈 밤'. 시적이고 비극적인 은유다. 보통의 엄마라면 천재성에 감탄했을 것이다.
기억난다. 어제 저녁 드라마 속 여주인공의 오열. 아이는 그 장면을 스치듯 보았다.
이선은 '아픔'을 모른다. '밤'의 고독도 모른다. 아이는 화면의 검은 색채와 스피커의 떨리는 주파수를 연결했고, 자신이 칠한 검은 면적이 그와 유사하다고 판단해 단어를 가져다 붙였다. 적절한 상황에 적절한 소리를 배치하는 능력일 뿐이다.
"이선아, 밤이 왜 아파?"
나는 물었다. 확인하고 싶었다. 네가 앵무새가 아님을. 네 안에도 이해라는 것이 존재함을.
이선은 눈을 깜빡이더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몰라. 그냥 배가 고픈 것 같아."
주저앉고 싶었다. 미간을 찌푸리는 각도, 입술을 삐죽이는 타이밍. 남편이 귀찮을 때 짓는 표정의 완벽한 복제였다.
아이는 거울이다. 부모의 말, 미디어의 소음, 세상의 표정을 무차별적으로 반사하는 투명하고 잔인한 거울. 아이를 안았다. 말랑한 살결이 느껴졌지만, 머릿속의 가설은 기각되지 않았다.
이 아이의 내면은 비어 있다. 수만 개의 단어 조각을 이어 붙인 정교한 모자이크일 뿐, 그 안에 '영혼'이라 부를 만한 원본은 없다.
일상은 삐걱거렸다. 동료와의 커피 타임, 논문의 서문, 심지어 거울 속 내 미소까지. 모든 것이 정해진 알고리즘을 수행하는 기계들의 연극처럼 보였다.
세계의 균열은 아주 물리적인 방식으로 다가왔다.
놀이터였다. 미끄럼틀 계단을 오르던 이선의 발이 허공을 밟았다.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아이의 몸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 순간, 머릿속을 맴돌던 '중국어 방'의 벽이 무너졌다.
"이선아!"
비명은 성대를 긁으며 터져 나왔다. 학습된 모성도, 사회적 합의에 따른 연기도 아니었다. 짐승의 울음소리. 논리가 끼어들 틈 없는 원초적 공포.
이마가 찢어진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었다. 붉은 선혈이 아이의 눈물과 섞였다.
"엄마, 엄마, 아파..."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움켜쥐었다. 손수건으로 상처를 압박하며 횡설수설했다.
"괜찮아, 엄마 여기 있어, 아무것도 아니야."
논리적으로 파탄 난 문장들. 피가 흐르는데 괜찮다니. 살이 찢어졌는데 아무것도 아니라니. 명백한 거짓말이었고, 동시에 그 순간 세상 어떤 진리보다 절박한 언어였다.
이선이 내 옷자락을 쥐어뜯으며 말했다.
"엄마... 나 유리가 된 것 같아."
숨이 턱 막혔다. 또다시 흉내다. 어디선가 들었을 '유리처럼 깨지다'는 관용구의 변형.
하지만 피 흘리는 아이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더 이상 앵무새의 소음이 아니었다.
아이는 자신의 고통을 설명할 가장 날카로운 단어를 검색했고, '유리'를 찾아내 나에게 던졌다. 그 단어의 출처가 어디든 상관없었다. 아이는 지금 온몸으로 자신을 봐달라고, 자신이 여기 부서져 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유리'라는 단어가 내 가슴에 박혀 산산조각 났다. 그 파편의 통증은 선명했다. 나는 아이가 바스라질세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응급실에서 돌아온 밤. 이선은 내 침대에서 잠들었다. 이마의 하얀 거즈 위로 달빛이 내려앉았다.
아이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손끝에 닿는 체온은 뜨겁고, 축축하고, 실재했다.
여전히 나는 인간의 내면을 증명할 수 없다. 우리는 정말로 텅 빈 방에 갇혀, 벽 틈으로 들어오는 쪽지에 맞춰 의미도 모른 채 답장을 쓰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내가 느끼는 이 안도감조차 진화가 설계한 호르몬의 장난일 수 있다.
하지만 인정하기로 한다.
우리가 앵무새라면, 그게 뭐란 말인가.
남편의 "사랑해"가 입력된 대본이라 해도, 그 말이 나의 하루를 지탱한다면 그것은 유효하다. 이선이 "유리가 된 것 같다"고 말했을 때, 그 흉내가 내 심장을 찢어놓고 서로를 끌어안게 만들었다면, 그 소통은 진실보다 무겁다.
중요한 건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가 아니다. 주고받는 그 얇은 쪽지들이 서로를 얼마나 단단하게 묶어주는가이다.
서로의 텅 빈 방을 견디게 해주는 필사적인 흉내.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슬프고도 완벽한 헌신이다.
잠든 아이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앵무새가 되어 속삭였다.
"잘 자. 엄마가 꿈속에서 나쁜 유리 조각들은 다 치워줄게."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맹세였다. 이선이 잠결에 웅얼거리며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 작은 움직임 하나로, 텅 비어있던 나의 방은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