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기점 884-G에 대한 기록
사건 ID: 884-G
사용자: 이안 (ID: 0419)
관측기기: '코펜하겐' 모델 7
분기점 등록: 2061년 3월 14일 11:51 (KST)
[등록된 선택지]
* 선택지 A: 아내, 리나의 '디지털 전송(Digital Upload)'에 동의한다.
* 선택지 B: 리나의 '디지털 전송'을 거부하고, 자연 소멸(임종)을 택한다.
그 기계의 공식 명칭은 '대안적 결과 보존기'였다. 엔지니어들은 양자역학의 다세계 해석을 응용했다고 설명했지만, 일반인들은 모두 그것을 '미련 상자'라고 불렀다.
이유는 잔인할 정도로 간단했다. 당신은 두 개의 중대한 선택지(A와 B)를 미리 기계에 등록한다. 기기는 당신의 의사결정 상태(decision-making potential)를 고도로 격리된 양자 시스템에 결속시킨다. 당신이 현실에서 A를 선택하는 순간, 당신의 '관측'은 당신의 현실을 A로 붕괴시킨다. 동시에, 결속된 시스템은 당신이 버린 B의 '잠재적 상태'를 붕괴 직전의 중첩 상태 그대로 '동결'시켜 보존한다.
하지만 당신은 B의 결과를 즉시 볼 수 없다. '미련 상자'는 B의 결과를 시뮬레이션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A를 선택한 '당신'에게 B를 '관측'시키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측은 항상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만약 당신의 A-현실이 아직 유동적인 상태(예: 선택을 번복할 수 있는 상태)라면, B를 관측하는 행위 자체가 당신의 A-현실에 파라독스를 일으킬 수 있다. 당신의 관측이 아직 닫히지 않은 과거에 '간섭'을 일으키는 셈이다.
따라서 기기는 '관측 완료' 상태를 요구한다. 당신이라는 관측자가 B의 잠재성에 더는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을 만큼, A의 현실에 '고정'되었을 때만 비로소 기기는 당신에게 B를 안전하게 붕괴시켜 보여준다.
당신은 당신의 잔을 모두 비우기 전에는 다른 이의 잔을 엿볼 수 없다. 선택은 대가를 치러야만 비로소 '선택'으로 기록되기 때문이다.
리나의 퇴행성 신경 질환은 그녀의 명민했던 정신을 단단한 두개골 속에서부터 서서히 붕괴시켰다. 우리 앞에는 두 개의 길이 놓였다.
선택지 A: 그녀의 의식을 스캔하여 서버에 업로드하는 것. 육체는 소멸하지만 '리나'라는 데이터는 남는다. 가상의 공간에서 그녀는 영원히 나와 대화하고, 생각할 수 있다.
선택지 B: 그녀의 손을 잡고, 인간적인 죽음(안락사)을 함께 맞는 것.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다.
리나는 내게 선택을 맡겼다.
"당신이 기억할 나의 모습은 당신이 선택해, 이안."
나는 '미련 상자'에 두 선택지를 등록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B를 선택했다. 나는 스크린 속의 데이터와 사랑을 나눌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마지막 온기를 택했다.
리나는 2061년 3월 20일, 내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나는 '선택지 B'의 삶을 살았다.
첫해는 집 안 모든 사물에서 리나의 부재를 느꼈다. 2년 차에는 그녀의 물건을 정리했다. 5년 차에는 직장을 옮겼다. 7년 차에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 노력했지만, 나 자신이 공허하게 느껴져 그만두었다.
내 삶은 리나의 죽음이라는 닻에 묶인 배처럼, 그 주변을 맴돌았다. 상실감은 무뎌졌지만, '만약'이라는 질문은 내 일상의 배경음이 되었다.
만약 내가 A를 선택했다면?
나는 지금쯤 모니터 속의 그녀와 웃고 있을까? 그녀는 여전히 '그녀'일까? 우리는 행복했을까? 아니, 적어도 나는 덜 외로웠을까?
나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선택지 B'의 결과를 '완료'시켜야만 했다. 기계가 B의 결과가 확정되었다고 인정할 만큼 충분히, 그리고 혹독하게 살아야 했다.
나는 답을 얻기 위해 10년이라는 세월을 지불했다.
리나의 10주기 기일. 나는 '미련 상자'가 있는 연구소의 차가운 관측실로 들어섰다. 내 삶(선택지 B)은 이제 '관측 완료' 상태로 승인되었다.
"사건 ID 884-G. 선택지 A의 관측을 요청합니다."
무거운 헬멧을 쓰자, 눈앞이 어두워졌다. 잠시 후, 어둠 속에 영상이 떠올랐다.
10년 전의 '나'가 보였다. 그는 '디지털 전송' 동의서에 서명하고 있었다. 리나의 육체는 기계 속으로 사라졌다. 며칠 후, '나'는 거실의 거대한 홈 서버 앞에 앉아 있었다.
[IAN-A]: "리나? 들려?"
화면에 텍스트가 떠올랐다.
[LINA_7.2]: "응, 이안. 들려. 여기는... 이상해. 생각이 너무 빨라. 하지만 빛은 따뜻하네."
나는 10년의 압축된 기록을 보기 위해 숨을 참았다.
처음 몇 달간, '나'는 행복해 보였다. 그는 모니터 속의 리나와 농담을 하고, 과거를 추억하고, 물리학 문제를 토론했다. 그녀는 여전히 리나였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내가 틀렸던 걸까? 이 길을 택했다면, 이 10년의 공허함을 피할 수 있었을까?
관측 영상 속의 '나'가 1년 차가 되어 그녀의 데이터와 기념일을 축하하는 케이크를 모니터 앞에 놓는 순간, 화면이 지지직거리며 정지했다.
그리고 시스템 텍스트가 시야를 덮었다.
[ 경고: 상호 관측 간섭 발생 ]
[ 대상 (ID: 884-G-A)이 현재 귀하의 분기점 (ID: 884-G-B)에 대한 관측을 시도 중입니다. ]
[ 동시적 접근으로 인해 관측이 강제 종료됩니다. ]
헬멧이 벗겨졌다. 관측실의 형광등 불빛이 눈을 찔렀다.
나는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상 ID 884-G-A.
그것은 '선택지 A'를 골랐던 '나'였다.
그 '나' 역시, 10년의 세월을 살았다. '디지털 리나'와 함께한 10년.
그리고 그 역시, 오늘, '미련 상자' 앞에 앉았다. 그 역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길, 즉 '리나의 자연스러운 죽음'을 택한 나의 삶(선택지 B)을 엿보려고 접속했다.
우리는 정확히 같은 순간에, 서로가 버린 길을 확인하려 했다.
나는 답을 얻지 못했다. 나는 '선택지 A'의 결말을 보지 못했다. 그저 행복해 보였던 '시작'만을 보았을 뿐이다.
'미련 상자'는 후회를 지우는 기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후회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저쪽의 '나' 역시, 자신이 선택한 10년의 삶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 역시 내가 겪은 고통과 정확히 같은 무게의 '미련'을 안고, 기계에 접속했다.
어느 쪽도 답이 아니었다.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선택하지 않은 길'의 무게를 짊어지도록 설계되었다.
나는 관측실을 나왔다. 기계의 모니터에는 '접근 불가'라는 붉은 글자가 깜박이고 있었다.
나는 리나를 잃은 삶을 살았다. 저쪽의 나는 리나를 잃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리고 우습게도 우리는 길 잃은 영혼처럼 서로의 삶을 기웃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