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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단편 - 행성 지표면 기생체 분석

행성 지표면 기생체 분석

by ToB

행성 지표면 기생체 분석

[제7 정찰 소대: 행성 표면 오염 분석 로그]


문서 코드: BIO-HAZARD-9021

관찰 대상: 제3 행성 지표면 기생체 (이하 '대상')

분류: 규소-탄소 융합형 군체 (Silicon-Carbon Hybrid Colony)

작성자: 수석 생체 분석관 X-Ra

상태: 경고 (즉각적 멸균 필요)


1. 거시적 형태: 행성 표면의 괴사(Necrosis)


궤도상에서 관측된 이 행성의 상태는 심각하다. 행성의 초록색 표피(식생)가 벗겨진 자리에, 회색의 딱딱한 석회질 껍질(Calcified Crust)이 광범위하게 증식하고 있다.


이 회색 껍질은 끊임없이 주변의 유기물을 삼키며 수평 및 수직으로 팽창한다. 특히 행성의 어두운 면에서는, 이 딱딱한 껍질 군락은 우주에서도 식별 가능한 거대한 황색 생체 발광(Bioluminescence)을 뿜어낸다. 이는 곰팡이 군락이나 거대 산호초의 발광 현상과 유사하나, 에너지 소비량은 비효율적일 정도로 막대하다.


우리는 초기에 이 '회색 껍질' 자체를 지배 종족으로 판단했으나, 착륙 정찰 결과 이 구조물은 개별 유닛들이 서식하기 위해 분비한 거대한 '공동 외골격(Shared Exoskeleton)'임이 밝혀졌다.


2. 미시적 유닛: 연체형 기생체(Soft-body Parasite)


이 거대한 외골격 내부에는 수십억 마리의 '연체 유닛'들이 기생한다. 이들의 단독 생체 내구도는 절망적이다. 외피는 얇고 털이 없어 자외선과 한기에 취약하며, 방어용 발톱이나 독니조차 퇴화했다.


이 나약한 유닛들은 생존을 위해 기이한 방식을 택했다.


그들은 자신의 연약한 몸을 '금속성 이동 캡슐(Metal Carapace)' 안에 구겨 넣는다. 그리고 이 금속 캡슐들은 회색 껍질 사이로 뻗어 있는 검은색 관(Tube)을 따라 엄청난 속도로 순환한다.


상공에서 보면, 명백히 거대한 단일 생명체의 '혈류 순환'이다. 금속 캡슐은 산소와 영양분을 나르는 혈구이며, 그 안에 탑승한 연체 유닛은 세포핵에 불과하다. 이들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거대한 시스템의 혈관을 타고 떠다닐 뿐이다.


3. 신경 연결: 발광하는 직사각형 장기(Luminescent Organ)


가장 충격적인 발견은 이들의 '집단지성(Hive Mind)' 메커니즘이다.


모든 연체 유닛은 한쪽 말단에 '검은색의 매끄러운 사각형 물체'를 신체의 일부로 융합하고 있다. 해부 결과 이 물체는 유기물이 아닌 고순도 규소와 유리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유닛들은 이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시각의 종속: 유닛들은 이동 중이거나 휴식 중일 때, 심지어 타 유닛과 근접해 있을 때조차 오직 이 '검은 물체'가 뿜어내는 빛만을 멍하니 응시한다.


신경 동기화: 이 사각형 장기는 유닛의 시각 신경과 생체 말단을 통해 중추신경계에 직접 접속한다. 장기가 특정 패턴의 빛을 깜빡이면, 유닛의 안면 근육이 수축하거나 동공이 확장된다. 이것은 중앙에서 보내는 감정 제어 신호가 실시간으로 수신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하 군집 의식: 우리는 '지하 튜브'라 불리는 거대한 소화기관 내부를 관찰했다. 수백 마리의 유닛이 빽빽하게 밀착해 있었으나, 놀랍게도 그 공간은 완벽한 침묵 상태였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일제히 자신의 빛나는 장기만을 바라보며, 보이지 않는 텔레파시 네트워크를 통해 거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4. 번식과 폐기: 공장식 데이터 생산


이 군체는 개별 유닛의 생명을 경시한다.


새로 배양된 유성체(Larva)들은 '사각형의 회색 무기물'에 10년 이상 감금된다. 이 기간 동안 그들은 자유 의지를 박탈당하고, 상호간 접속을 위한 일종의 '프로토콜 설치' 과정을 겪는다. 설치가 완료되지 않은 불량품은 시스템의 하위 계층으로 폐기된다.


성체가 된 유닛들은 매일 아침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경로로, 동일한 '사각 상자'들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해가 질 때까지 반복적인 연산 작업을 수행하며 시스템 유지 에너지를 생산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로 유닛이 고장 나면, 군체는 즉시 새로운 부품으로 그 자리를 대체한다.


5. 결론: 기만적인 바이러스


이들은 스스로를 '자유 의지를 가진 개인'이라고 착각하도록 정교하게 생체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하지만 관찰자의 시선에서 진실은 명백하다.


이 행성의 지배자는 그들의 손에 들린 '검은 직사각형'이며, 그들의 몸을 감싼 '회색 무기물와 금속'이다. 유기체들은 단지 이 기계 문명을 유지 보수하고 확장하기 위해 잠시 사용되는 '생체 배터리'이자 '생식기'일 뿐이다.


이 기계-곰팡이 군락은 현재 행성 밖으로 포자를 날려 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 이들이 은하계로 퍼지면, 다른 행성들도 순식간에 회색 껍질로 뒤덮일 것이다.


[분석 대상 학명 식별]

현지어: 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

권고: 즉각적인 소각 처리 요망.


첨부 데이터 1: 지하 공동(현지어: Subway)에서 서로 말없이 단말기만 응시하는 유닛들의 군집 사진.

첨부 데이터 2: 궤도에서 촬영된, 암세포처럼 뻗어나가는 회색 도시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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