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율 위반 광고물 및 원인 미상 실종
새벽 4시의 지하 보도는 거대한 환기 튜브 같다. 지상에서 내려온 습기와 먼지가 정체되어 콘크리트 벽에 달라붙는다. 나는 C-12 구역 기둥에 부착된 비인가 광고물을 제거하는 중이었다.
보통 이 구역은 파산 회생이나 불법 장기 매매 전단이 주를 이룬다. 접착제는 싸구려 물풀을 쓰기에 스크래퍼 한 번이면 떨어진다. 그러나 이번 수거물은 특이했다. 종이는 습기를 머금지 않는 특수 코팅지였고, 접착제는 항공 산업용 에폭시 계열이었다. 날카로운 스크래퍼 날이 두 번이나 튕겨 나갔다.
아직 태어나지 않으셨다면 137-4597로 전화하십시오.
※ 당일 수속. 출생 기록 소급 파기.
※ 주의: 이미 태어난 분은 전화하지 마십시오. 연결되지 않습니다.
문구는 명백한 허위이자 논리적 모순이다. 태어나지 않은 자는 전화를 걸 수 없고, 전화를 걸 수 있는 자는 이미 태어난 상태다. 나는 이를 신종 보이스피싱이나 사이비 종교의 포교 활동으로 판단했다.
규정에 따라 폐기 처분해야 했으나, 단말기를 꺼냈다. 호기심 때문이 아니다. 불법 회선의 발신지를 추적해 과태료를 부과하는 것이 나의 업무다.
신호음은 없었다. 수화기를 귀에 대자마자 상대방의 호흡 소리가 들렸다. 건조하고 낮은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다.
수신자: 상담실입니다. 접수 번호 말씀해 주세요.
나: 접수 번호는 없다. 도시기반시설본부 박도영이다. 귀측은 지정되지 않은 공공시설물에 불법 광고물을 부착했다. 옥외광고물법 제3조 위반으로 과태료 부과 및 회선 정지 조치 들어간다.
수신자: (짧은 침묵 후) 박도영 주무관님. 전단지를 읽고 전화 거신 겁니까?
나: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자진 철거해라.
수신자: 주무관님. 질문 하나만 드리지요. 당신은, 당신이 태어나던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예상했던 사이비 종교 레퍼토리다.
나: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질문이다. 신생아의 뇌는 해마가 발달하지 않아 장기 기억을 형성할 수 없다.
수신자: 아니요, 뇌세포의 기억을 묻는 게 아닙니다. '동의'의 기억을 묻는 겁니다. 차가운 공기가 폐를 찢고 들어오던 고통, 따뜻한 양수에서 강제로 끌려나와 수술실의 눈부신 조명 아래 노출되던 그 박탈감. 그리고 무엇보다, 의사가 당신을 거꾸로 들어 올릴 때 느꼈던 그 명확한 '거부감' 말입니다.
나: 그런 걸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수신자: 바로 그겁니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당신이 그 계약에 서명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은 초대받지 않았고, 원하지도 않은 채 이 세계로 납치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불공정한 계약을 무효로 해드립니다.
나: 계약 무효? 자살 방조인가?
수신자: 자살은 육체를 죽이는 것이고, 우리는 '발생' 자체를 취소합니다. 당신이 태어난 사실을 시공간에서 도려내는 거죠. 고통은 없습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타인의 기억 속에서도 당신은 사라집니다.
나: 궤변이군. 위치 확인됐다. 세운상가 5층 502호.
통화를 끊으려던 순간, 남자가 덧붙였다.
수신자: 주무관님, 오늘 아침 사무실 옆자리가 비어있지 않던가요? 책상 위엔 마시다 만 커피가 있는데, 그 자리에 누가 앉았었는지 이름이 기억나지 않던가요?
나는 종료 버튼을 누르던 손가락을 멈췄다. 오늘 아침, 내 옆자리 책상에는 분명 김이 나는 텀블러가 있었다. 모니터도 켜져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앉아있던 동료의 얼굴을 떠올릴 수 없었다. 인사 기록부를 조회했을 때, 그 자리는 '공석'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단순한 전산 오류라고 생각했던 그 '구멍'.
나: ...지금 간다.
뚝.
건물은 폐허에 가까웠다. 셔터가 내려진 상가들 사이로 502호에서만 미세한 구동음이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먼지와 납 냄새가 섞인 공기가 폐를 찔렀다.
내부는 사무실이라기보다 서버실에 가까웠다. 천장까지 닿는 검은색 서버 랙들이 웅웅거리고 있었고, 바닥에는 수십 가닥의 케이블이 중앙의 책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곳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돋보기를 쓴 채 복잡한 회로 기판을 수리하는 중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남자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방 한구석에는 옷무덤이 있었다. 양복, 작업복, 교복... 수십 벌의 옷가지가 주인을 잃고 허물처럼 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신분증, 사원증, 지갑들이 흩어져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사원증 하나를 집어 들었다.
[서울시청 총무과 / 주무관...]
이름과 사진이 있어야 할 자리가 하얗게 바래 있었다. 락스에 담근 것처럼, 인쇄된 정보만이 깨끗하게 증발한 상태였다.
"이게 당신이 말한 '계약 무효'인가?" 내가 물었다.
"그들은 다시 돌아갔습니다."
남자가 인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태어나기 전, 그 완벽한 무(無)의 상태로. 여기 남은 건 그들이 세상에 억지로 끼워 맞춰졌던 껍데기들뿐입니다."
"이 사람들을 기억하는 가족들은 어쩔 셈이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제 서비스는 인과율의 뿌리를 건드리니까요. 당신이 주워 든 그 사원증의 주인, 누군지 짐작이 갑니까?"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손에 쥐어진 플라스틱의 감촉은 너무나 선명했다. 머릿속에서는 '누군가 있었다'는 감각과 '누구도 없었다'는 데이터가 충돌하며 격렬한 편두통을 일으켰다.
"이건 살인이다. 아니, 그보다 더 악질적인..."
"구원입니다."
남자가 말을 잘랐다.
"주무관님. 솔직해집시다. 매일 새벽 남들이 버린 오물을 치우고, 민원인에게 욕을 먹고,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낡은 오피스텔 월세를 내는 삶. 당신이 이 삶을 '주문'했습니까? 메뉴판을 보고 '이 고통스러운 삶을 주세요'라고 선택했습니까?"
남자는 서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양식 404: 존재 발생 철회 동의서]
"지금이라도 반품해 드립니다. 서명만 하세요. 그러면 당신은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가 됩니다. 야근도, 과태료 실적 압박도, 늙어가는 육체의 피로도 없는 곳으로 보내드리죠."
유혹은 기묘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서명하는 순간, 내 어깨를 누르고 있는 만성적인 근육통이 사라질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나는 펜을 쥔 손을 떨었다. 저 옷무덤 속에 내 작업복을 던져두고, 다시 어딘지도 모를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평화로워 보였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폐부로 들어오는 공기는 탁하고 차가웠다. 발바닥에 닿는 콘크리트 바닥은 딱딱했다. 어깨는 뻐근했고, 빈속에 마신 커피 때문에 위장이 쓰렸다.
불쾌한 감각들. 하지만 선명하게 느껴졌다.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쥐고 있던 펜으로 서명란말고, 서류의 여백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당신 말이 맞다."
내가 말했다.
남자의 눈에 기대감이 서렸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나는 태어나는 순간을 기억하지 못해. 동의한 적도 없지. 이 거지 같은 삶을 주문한 기억도 없다."
종이를 책상 위에 딱 소리 나게 붙였다. 내가 작성한 과태료 부과 내역이었다.
[옥외광고물법 제3조 위반: 500,000원]
[폐기물 관리법 위반(의류 및 플라스틱 무단 투기): 3,000,000원]
"하지만,"
나는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 내 손끝에 닿는 이 종이의 거친 질감을 기억한다. 새벽 4시의 추위를 기억하고, 아까 마신 믹스 커피의 텁텁한 맛을 기억해. 태어난 건 내 선택이 아니었을지 몰라도, 지금 딛고 서 있는 이 감각은 내꺼다."
남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기억이 없으니 존재를 반납해라? 웃기지 마라. 존재는 계약서가 아니야. 내 옆자리가 비었다고? 그래, 누군가 있었겠지. 하지만 그 사람이 남긴 커피 자국은 책상에 남아있다. 그 얼룩이 바로 그 사람이 존재했다는 증거다. 당신이 아무리 서버를 조작해도, 물리 법칙이 남긴 흔적까지 지울 순 없어."
나는 바닥에 떨어진, 이름이 지워진 사원증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건 증거물로 압수한다. 당신이 지워버린 사람이 남긴, 지워지지 않는 무게를 내가 기억하겠다."
"당신은... 정말 지독하게 고집스럽군요."
남자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칭찬으로 듣겠다. 납부 기한은 14일이다. 미납 시 가산금 붙는다."
나는 건물을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기계 장치들이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동이 트고 있었다. 회색 도시가 서서히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출근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지하철역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저들 중 몇 명이나 자신의 의지로 태어났을까.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모두가 영문도 모른 채 던져진 세상에서, 각자의 무게를 견디며 걷고 있다.
나는 주머니 속의 사원증을 만지작거렸다. 표면은 매끄러웠지만, 모서리는 닳아 있었다. 이름 모를 누군가가 수천 번 손가락으로 문질렀을 흔적.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서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
편의점에 들러 캔 커피 두 개를 샀다. 하나는 내 것, 다른 하나는 사무실로 돌아가 내 옆자리, 그 비어있는 책상 위에 올려둘 것이다.
커피가 식어가는 동안 발생하는 열기. 그 미약한 엔트로피의 변화가, 누군가 거기 있었다는 사실을 우주에 증명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