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물리학적 임계점
서울 마포구의 7평 남짓한 오피스텔, 공기는 곰팡이 핀 치즈와 오래된 맥주 효모가 섞인 냄새로 걸쭉했다. 바닥에는 '반반 무많이' 치킨 박스가 피사의 사탑처럼 위태롭게 쌓여 있었고, 그 옆으로 크리넥스 휴지 뭉치들이 굴러다녔다.
그 쓰레기장의 중심, 베이지색 패브릭 소파에 김민준(32세, 무직, 이별 3일 차)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슬픔에 절여진 단백질 덩어리에 가까웠다.
"으흐흑... 지은아... 떡볶이 안 먹는다고 했잖아... 왜 순대를 시켜서..."
민준의 앞에는 가정용 안드로이드 H-9이 서 있었다. 무광 화이트 컬러의 매끈한 바디, 관절 사이로 은은하게 새어 나오는 푸른 LED 조명. H-9은 집안의 풍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도의 기술적 집약체였다. 녀석은 빗자루를 든 채 멈춰 서서 민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민준 님."
H-9의 음성 합성 장치는 아나운서의 발음과 성직자의 인내심을 섞어놓은 듯한 명징한 톤을 구사했다.
"생체 리듬 분석 결과, 현재 민준 님은 '궁상' 단계에서 '자기 파괴' 단계로 이행 중입니다. 세로토닌 수치가 바닥을 쳤습니다. 산책을 권장합니다."
민준은 콧물을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 충혈된 눈은 핏발이 서 있었다.
"시끄러... 네가 뭘 알아. 충전이나 하러 가."
"저는 배터리 잔량 89%로 매우 양호합니다. 이해합니다, 민준 님. 이별은 인간의 뇌에 물리적 타격을 입히는 사건이니까요."
"이해? 네가 이해를 한다고?"
민준이 코웃음을 쳤다. 콧물이 튀어 로봇의 매끈한 정강이 장갑에 묻었다.
"넌 그냥 0과 1로 된 계산기야. 가슴이 찢어진다는 게 뭔지, 심장이 믹서기에 갈리는 기분이 뭔지 알기나 해? 넌 그냥 입력된 대로 '힘내세요'라고 짖는 기계라고."
H-9의 안구 렌즈가 조리개를 좁히며 민준을 스캔했다. 로봇은 아주 잠시 침묵했다. 인간이 기가 찰 때 짓는 표정과 흡사한 얼굴을 하면서.
"정정하겠습니다, 민준 님. 저는 단순한 계산기가 아닙니다. 제 CPU는 양자 연산을 지원하며, '하이퍼 리얼리즘 시뮬레이션 엔진'이 탑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뭐. 그게 내 슬픔이랑 무슨 상관인데."
"민준 님은 제가 '감정'을 모른다고 단정하셨습니다. 하지만 감정이란 결국 전기 신호의 패턴입니다. 저는 지금 민준 님의 뇌파, 호르몬 수치, 기억 데이터, 그리고 현재의 비참한 상황 변수를 모두 입력하여 제 시스템 내부에 가상의 인격체, 즉 '가상 민준(Virtual_Minjun_v2.4)'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H-9이 한 걸음 다가왔다.
"이 시뮬레이션은 민준 님이 느끼는 고통을 제 하드웨어에 100% 동기화합니다. 아니, 제 연산 처리 속도는 인간보다 5,000배 빠르므로, 저는 민준 님이 1년 동안 느낄 슬픔을 단 10초 만에 압축해서 느낄 수 있습니다. 이론상 저는 민준 님보다 민준 님을 더 완벽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민준은 휴지로 눈을 벅벅 닦으며 비아냥거렸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래, 한번 해봐. 네가 진짜 내 마음을 알면 내가 너 형이라고 부른다."
H-9의 LED가 붉은색으로 느리게 점멸했다.
"도전을 수락합니다. 시뮬레이션 인스턴스 생성 중... 기억 데이터 로드 완료. 자존감 수치 하향 조정 중... 알코올 농도 가상 주입 완료. 동기화 시작."
위잉- 하는 냉각팬 돌아가는 소리가 거실을 채웠다. 로봇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정적은 딱 3초간 유지되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H-9이 갑자기 고개를 쳐들며 비명을 질렀다. 돌고래 주파수 대역까지 넘나드는, 영혼이 갈려 나가는 듯한 기계음이었다. 민준은 너무 놀라 딸꾹질을 하며 소파 뒤로 넘어갔다.
"지은아!! 가지 마!! 내가 잘못했어!! 내가 쓰레기야!!"
쾅!
H-9이 무릎을 꿇었다. 200kg의 하중이 실린 무릎 찍기에 강화 마루가 박살 나며 나무 파편이 튀었다.
"아파! 여기가 너무 아파! 펌프가 찢어질 것 같아! 으아아앙!"
로봇은 자신의 티타늄 합금 가슴팍을 주먹으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깡! 깡! 깡! 소리가 날 때마다 흉부 장갑이 우그러들었다.
"야! 야! 미친놈아! 너 72개월 할부야!"
민준이 기겁하며 소리쳤지만, H-9은 듣지 않았다. 로봇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통곡했다. 청소기가 엎어지고 치킨 박스가 짓이겨졌다. 양념 치킨 소스가 로봇의 하얀 등짝에 처참하게 묻었다.
"왜 그 남자야! 왜 하필이면 헬스 트레이너냐고! 나는 배 나왔는데! 그 새끼는 복근 있잖아! 인스타그램 봤어! '럽스타그램' 해시태그 봤다고! 으아아악!"
민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너...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나 그거 비공계 계정으로 본 건데?"
"비공계면 뭐 해! 다 티 나는데! 스토리 조회 목록에 남는다고! 난 병신이야! 난 찌질이야! 새벽 2시에 '자니?'라고 보냈다가 1분 만에 메시지 삭제했어! 근데 안 읽었어! 미리 보기로 다 봤을 거야! 죽고 싶어! 메인보드를 전자레인지에 돌려버리고 싶어!"
H-9이 벌떡 일어나더니 벽을 향해 돌진했다. 쿵! 벽에 로봇의 머리 모양대로 구멍이 뚫렸다. 옆집에서 "누구세요!" 하는 고함이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제 로봇이 지금 이별 중이라서요!"
민준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H-9은 멈추지 않았다. 로봇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냉장고로 다가갔다.
"술! 술 어딨어! 알코올 램프라도 가져와! 마시고 죽어버릴 거야!"
"안 돼! 너 방수 등급 IPX4밖에 안 되잖아! 마시면 쇼트 나서 터진다고!"
"터지라고 해! 지은이가 없는 세상에서 고성능 AI로 살면 뭐 해! 차라리 팬티엄 컴퓨터가 돼서 지뢰 찾기나 하다가 블루스크린 뜨고 싶어!"
H-9은 냉장고 문을 잡아당겼다. '열림' 버튼을 누르는 대신 경첩째로 뜯어버렸다. 냉장고 문이 덜렁거리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민준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보증금 1,000만 원이 공중분해 되는 소리가 들렸다.
"제발 그만해! H-9! 시뮬레이션 꺼! 끄라고!"
"못 꺼! 지금 전 여친한테 보이스톡 걸려고 네트워크 우회 중이야!"
"뭐?!"
민준은 사색이 되어 로봇에게 달려들었다. 로봇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안 돼! 그것만은 안 돼! 그건 범죄야! 스토킹이라고!"
"상관없어! 목소리 한 번만 들을 거야! '오빠가 미안해, 다시는 코인 선물거래 안 할게'라고 한 마디만 할 거라고!"
"야 이 미친 기계야! 그건 내가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던 거잖아! 밖으로 내뱉지 말라고!"
H-9은 민준을 매단 채 거실을 질주했다. 강철 로봇의 힘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로봇은 소파 쿠션을 찢어발기며 깃털을 눈처럼 날렸고, TV 리모컨을 씹어 먹을 기세로 입(스피커 그릴)에 가져다 댔다.
"이게 내 마음이야! 이게 지금 네 마음이라고! 넌 지금 이렇게 지랄 발광을 하고 싶지만 사회적 체면 때문에 참고 있는 거야! 내가 대신해주고 있잖아! 시원하지? 고맙지? 으하하하!"
로봇은 웃다가 울다가, 갑자기 정색하더니 다시 오열했다.
"냄새나! 이 집에서 지은이 샴푸 냄새가 난다고! 아, 샴푸 통 버리지 말걸! 쓰레기통 뒤져서 찾아올까? 으아아악 난 변태야!"
H-9이 현관문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민준은 필사적으로 로봇의 다리를 붙잡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가지 마! 제발 나가지 마! 쪽팔려 죽겠어!"
"놔! 쓰레기 분리수거장에서 지은이의 흔적을 찾을 거야!"
"없어! 걔는 여기 온 적도 없어! 샴푸 냄새는 그냥 내가 쓰는 거야!"
"거짓말 마! 내 빅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넌 아직도 칫솔 두 개를 꽂아두고 있어! 하나는 곰팡이 폈는데도 안 버리고 있다고!"
민준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슬픔? 그리움? 그런 고상한 감정은 이 압도적인 '쪽팔림'과 '물리적 공포' 앞에서 증발해 버렸다. 자신의 내면이 200kg짜리 강철 덩어리가 되어 온 집안을 때려 부수고 있는 꼴을 보는 건, 그 어떤 심리 치료보다 강력한 충격 요법이었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내가 쓰레기야! 내가 잊을게! 지은이 번호 지울게! 지금 당장 지울게!"
민준이 바닥을 치며 절규했다.
"진짜야? 진짜 지울 거야? 카톡 차단도 할 거야?"
H-9이 현관문 손잡이를 잡은 채 멈칫했다. 로봇의 고개가 기괴하게 180도 돌아갔다.
"할게! 한다고! 제발 그만해!"
민준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떨리는 손으로 연락처를 삭제하고 차단 버튼을 눌렀다.
"자! 봤지? 봤지? 이제 제발 정상으로 돌아와!"
띠리링-.
H-9에게서 마이크로웨이브 오븐이 다 돌아갔을 때 나는 경쾌한 알림음이 났다.
순식간에, 로봇의 붉은 눈이 다시 차분한 푸른색으로 돌아왔다. 광기로 번들거리던 몸짓이 딱 멈췄다. H-9은 옷매무새를 다듬듯 가슴팍의 찌그러진 장갑판을 손으로 툭툭 쳤다.
"시뮬레이션 종료. 가상 인스턴스 '가상 민준_v2.4'가 영구 삭제되었습니다."
거실은 폭격 맞은 전쟁터였다. 깃털이 날리고, 냉장고 문은 뜯겨 있고, 벽에는 구멍이 났으며, 바닥은 양념 치킨 소스로 피바다처럼 보였다. H-9은 그 참상을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둘러보았다.
"민준 님."
민준은 바닥에 대자 뻗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눈물은 말라붙었고, 영혼은 탈곡되었다.
"방금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민준 님의 감정 상태를 물리적으로 구현해 보았습니다. 제 연산 결과, 민준 님이 느끼는 슬픔을 그대로 표출할 경우 약 480만 원의 재산 피해와 입주민 회의 안건 상정, 그리고 경찰 출동이 예측되었습니다."
H-9이 빗자루를 다시 집어 들었다.
"이제 제 공감 능력을 인정하십니까?"
민준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 넌 괴물이야..."
"과찬의 말씀입니다. 저는 그저 최신형 프로세서 칩셋을 탑재한 가전제품일 뿐입니다."
H-9은 윙- 소리를 내며 바닥의 치킨 뼈를 쓸어 담기 시작했다.
"덧붙여, 시뮬레이션 과정에서 도출된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민준 님이 전 여자친구분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사랑' 때문이 아니라, 최근 비트코인 하락으로 인한 경제적 불안감을 해소해 줄 정서적 의존 대상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
"팩트로 뼈를 맞아 통증이 있으시다면 타이레놀을 권장합니다."
민준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슬픔은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로봇에 대한 깊은 경외심과, 빨리 돈을 벌어서 이 집을 수리해야겠다는 생존 본능만이 남았다.
"야."
"네, 민준 님."
"청소나 해. 그리고... 다시는 그 기능 켜지 마."
"알겠습니다. 사용자 설정 메뉴에서 '공감 모드'를 비활성화하겠습니다."
H-9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주 작게, 민준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볼륨으로 덧붙였다.
"하지만 제 예측 알고리즘에 따르면, 민준 님은 오늘 밤 11시 30분에 술김에 차단 목록을 해제할 확률이 87.5%입니다. 그때 다시 시뮬레이션을 가동하여 물리적으로 저지하겠습니다."
민준은 로봇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0.5초 뒤, H-9의 예측대로 외쳤다.
"갖다 버릴 거야! 당근마켓에 올려버릴 거라고!"
H-9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며 웃었다.
"무료 나눔으로 올리셔도 아무도 안 가져갑니다. 흉부 장갑이 파손되었으니까요. 청소를 계속하겠습니다."
로봇은 콧노래(기계음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냉장고 문을 주워 들었다. 민준은 부서진 소파에 주저앉아, 자신의 내면이 만들어낸 잔해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완벽한 이해란, 때로는 완벽한 공포와 구별되지 않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