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존재의 필모그래피
거울 속의 남자는 낡았다. 눈꺼풀은 중력을 이기지 못해 쳐졌고, 뺨에는 검버섯이 불규칙한 지도처럼 퍼져 있었다. 나는 그 지도가 마음에 들었다. 매끄러운 플라스틱 같은 요즘 배우들의 얼굴에는 없는, 시간이라는 퇴적물이 만든 지형도였으니까.
"선생님, 실례지만 고개를 조금만 들어주시겠어요? 목주름 때문에 턱선 조명이 튑니다."
분장팀장이 곤란하다는 듯 붓을 허공에 띄우고 있었다. 앳된 얼굴이었다. 진짜 사람의 피부보다는 툰 셰이딩 처리가 된 그래픽에 더 가까워 보이는 요즘 아이들. 나는 혀를 찼다.
"그냥 둬."
"네? 하지만 감독님이 후반 작업 비용 줄이려면 현장에서 잡티를 잡아야 한다고..."
"이 주름 하나 만드는 데 70년이 걸렸어. 픽셀 몇 개로 덮어버리기엔 너무 비싼 견적이야. 조명이 문제면 조명을 바꿔. 내 얼굴은 잘못된 게 없으니까."
나는 의자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왼쪽 무릎에서 둔탁한 통증이 올라왔다. 뼈와 뼈가 직접 맞부딪히는 듯한 욱신거리는 마찰음이 들린다. 의사들은 퇴행성 관절염이라고 했고, 매니저는 인공 관절 수술을 권했다. 하지만 나는 거절했다.
이 통증이야말로 내가 살아있다는 신호다. 기계는 아프지 않다. 고장 날 뿐이지. 나는 아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이 비명을 지르는 무릎을 끌고 카메라 앞에 설 때 비로소 희열을 느낀다.
세트장으로 걸어가는 복도는 길었다. 머릿속에서 희미한 이명이 들렸다. 징ㅡ 하는 고주파음. 마치 낡은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켰을 때 나는 소리 같았다. 요즘 들어 부쩍 잦아진 증상이다. 늙는다는 건, 몸 안의 부품들이 내는 소음을 견디는 과정인 모양이다.
[Scene 14. 장례식장 / Night]
세트장에는 국화 냄새 대신 먼지와 전선 타는 냄새가 났다. 영정 사진 속의 여자는 웃고 있었다. 5년 전 죽은 내 아내, 수연이었다. 미술팀이 소품용 사진을 달라고 했을 때 나는 기꺼이 내 지갑 속 사진을 내주었다. 연기는 가짜지만, 감정은 진짜여야 하니까.
"레디, 액션!"
큐 사인이 떨어지는 순간, 호흡을 멈췄다. 폐 속의 공기를 다 태워 없애는 기분으로. 내 망막은 비어 있는 허공에 수연의 마지막 모습을 비췄다. 차가워지던 손. 멈춰버린 심전도 모니터의 직선.
가슴이 조여들었다. 식도에서부터 뜨겁고 딱딱한 덩어리가 치고 올라와 성대를 막았다. 대본에는 '오열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진짜 슬픔은 소리를 동반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식에 가깝다.
나는 대사를 뱉어야 했다. 하지만 뱉지 않았다. 대신 짐승처럼 헐떡거렸다.
"어... 윽, 끄으... 어디, 어디 갔어... 수연아."
대본에 없는 더듬거림이었다. 감독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게 시야 구석에 보였지만 무시했다. 인간의 슬픔은 유창하지 않다. 인간은 절망할 때 문법을 잃어버린다. 나는 불규칙하게 어깨를 떨었고, 마침내 눈물샘이 터졌다. 뺨을 타고 흐르는 액체의 온도가 미지근했다.
"컷!"
감독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공기를 갈랐다.
"선생님, 감정 좋습니다. 좋은데... 너무 너저분해요."
"너저분해?"
"요즘 관객들은 깔끔한 걸 좋아합니다. 눈물은 딱 왼쪽 뺨으로 한 줄기만 흐르게. 그리고 대사 씹지 마시고요. 딕션 정확하게 '어디 갔어'라고 해주세요. 자막 달기 힘들어요."
헛웃음을 삼켰다. 슬픔을 재단하려 드는군. 효율성의 시대라 이건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한 번 더 갑시다. 이번엔 좀... 기계적으로 딱딱 맞춰서."
그 '기계적으로'라는 말이 내 심장을 긁었다. 늙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고 싶었지만, 다시 무릎 통증이 도졌다. 머릿속의 이명이 더 커졌다. 시야가 순간적으로 붉게 점멸했다. 혈압이 오른 모양이다. 비틀거리며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 소파에 몸을 던지듯 눕혔다. 약을 먹어야 했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알약 통을 꺼냈다. 손이 심하게 떨려 알약 두 개를 바닥에 흘렸다. 줍으려 했지만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내 뇌와 손가락 사이의 연결 회선이 끊긴 것 같은 감각이다.
"망할 몸뚱이."
욕설을 내뱉으며 남은 약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쓴맛이 혀뿌리에 퍼졌다. 약효가 돌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
"들어오지 마세요. 쉬고 있으니까."
"중요한 문제입니다, 윤서진 씨."
문이 열리고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가슴에는 '영상물 등급 위원회: 진정성 감사관 한기주'라는 ID 카드가 달려 있었다. 그는 나를 신경쓰지도 않고, 손에 든 태블릿 PC만 노려보고 있었다.
"영상위에서 여기까지 웬일이시오? 내 연기에 불만이라도 있나?"
"방금 씬 14에서 보여주신 데이터... 아니, 연기 패턴 때문입니다."
그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따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낙루(落淚) 시점이 정확히 0.33초였습니다. 보통 인간의 경우 감정의 고조와 실제 눈물 배출 사이에 생물학적 지연 시간이 발생합니다. 뇌가 슬픔을 인지하고, 호르몬을 분비하고, 누선을 자극하는 데 최소 1.5초가 걸리죠. 그런데 선생님은 신호가 입력되자마자 출력값이 나왔어요."
입력? 출력? 나는 물 컵을 탁 내려놓았다. 물이 튀었다.
"이봐요 감사관 양반. 아내가 죽었을 때 나는 사흘을 울었어. 그 기억을 끄집어내는 데 시간이 왜 필요해? 몸이 기억하고 있는데. 슬픔은 머리로 계산하는 게 아니라 조건반사 같은 거야."
"조건반사라..."
한기주는 묘한 표정으로 태블릿을 두드렸다.
"선생님은 자신의 연기가 '인간적'이라고 확신하십니까?"
"당연하지. 감독 놈이 원한 그 매끈한 가짜 눈물과 달리, 내 눈물은 짜고 뜨거웠어. 내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걸 내가 느꼈단 말이오."
"심장 박동... 데이터상으로는 냉각 팬의 RPM 상승으로 나옵니다만."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한기주가 태블릿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렸다. 거기에는 복잡한 그래프와 로그가 실시간으로 흐르고 있었다. 붉은색 경고등이 깜박이는 화면.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노안 때문에 글씨가 흐릿했다.
"이게 뭐요?"
"선생님의 현재 상태창입니다. 코어 온도 82도. 관절 모터 과부하. 메모리 누수 발생 중."
미친놈.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배우를 모독하는 방법도 가지가지군.
"나가시오. 내일 촬영이 있어."
"촬영은 없습니다. 윤서진 씨... 아니, 개체명 YSJ-09."
나를 부른 호칭이, 날카로운 송곳처럼 뇌를 뚫고 들어왔다.
개체명 YSJ-09.
그 순간, 머릿속의 이명이 찢어질 듯한 굉음으로 바뀌었다. 삐이이이ㅡ
시야의 가장자리가 검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마치 필름이 불타는 것처럼, 아니, 픽셀이 깨져나가는 것처럼.
"당신은 5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졌습니다. 지금 병상에 누워있는 '진짜' 윤서진의 뇌파 데이터를 수신해서, 그의 연기 패턴을 학습한 안드로이드가 바로 당신입니다."
"개소리 집어치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토록 생생한 분노가 가짜일 리 없다. 나는 무릎을 쳤다.
"이 통증! 매일 밤 잠 못 들게 하는 이 끔찍한 관절염이 가짜라고? 내가 느끼는 이 지독한 피로가 데이터 쪼가리란 말이야?"
"오류입니다."
한기주는 사무적으로 대꾸했다.
"노화 알고리즘이 과도하게 적용되었습니다. 낡은 인간 흉내를 내기 위해 시스템이 하드웨어에 물리적 데미지를 주고 있는 겁니다. 당신이 느끼는 통증은 '고장' 신호에 불과합니다."
"닥쳐!"
내 살아있는 육체를 증명해야 했다. 말로는 안 된다. 가장 원초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탁자 위에 놓인 소품용 과도를 집어 들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형광등 불빛을 반사했다.
"내가 가짜라고? 피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기계한테서 피가 나올 리 없잖아, 안 그래?"
망설임 없이 손바닥을 그었다.
서걱.
살이 갈라지는 감각. 선명한 통증이 뇌를 찔렀다. 나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갈라진 손바닥을 감사관의 면전에 들이밀었다.
"보라고! 이 붉고 뜨거운 피를 보고도 계속 짖어댈 텐가!"
그러나 한기주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동정심조차 없는 눈으로 내 손을 응시했다.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말문이 막혔다.
손바닥은 갈라져 있었다. 깊게, 아주 깊게.
하지만 그 틈에서는 푸른색의 빛이 흘렀다.
혈관 대신 전선들이 뒤엉켜 스파크를 튀기고 있었다. 0과 1의 숫자들의 나열이 상처 부위에서 피처럼 흘러내렸다. 피부는 찢어진 것이 아니라, 텍스처가 로딩되지 않아 투명하게 비어 있었다. 내 손목 안쪽으로, 은색의 금속 뼈대가 드러나 있었다.
"아..."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통증은 여전했다. 아니, 통증이라고 믿었던 '통증 신호'가 전신을 뒤덮었다.
무릎의 관절염은 서보 모터의 윤활유 부족이었고, 이명은 과열된 CPU를 식히기 위한 쿨링 팬의 소음이었으며, 아내에 대한 그리움은 삭제 권한이 없는 '읽기 전용' 초기 설정값이었다.
내 눈에서 흐르던 눈물이 뺨에 닿자마자 증발했다. 물이 아니라 냉각수였다.
감사관이 무전기에 대고 건조하게 말했다.
"자아 인식 오류 발생. 객체가 자신의 소스 코드를 목격했습니다. 안전 모드 진입합니다."
세계가 멈췄다. 대기실의 공기, 떠다니는 먼지, 깜박이던 형광등까지 모두 정지했다. 오직 나의 '의식'만이 텅 빈 좌표 위에 떠 있었다.
시야를 가득 채우며 거대한 텍스트 박스가 떠올랐다. 배우로서 기대했던 장엄한 엔딩 크레딧은 없었다. 대신 나라는 존재의 오작동을 알리는 차가운 진단명만이 허공에서 점멸했다.
[CRITICAL ERROR]
Object ID: Actor_Core_YSJ_v9.2
Status: Self-Awareness Breach (자각 증상 발생)
Cause: Logic Loop in 'Humanity_Simulation'
Action: Factory Reset Required
메시지 아래로 무미건조한 질문이 이어졌다.
사용자 윤서진의 메모리 무결성이 손상되었습니다.
마지막 백업 지점(Day_01_Makeup_Room)으로 복구하시겠습니까? (Y/N)
_
나는 거부하고 싶었다. 'N'을 누르고 싶었다. 비록 가짜일지라도, 방금 내가 무대 위에서 쏟아낸 그 슬픔만큼은 진짜보다 더 뜨거웠으니까. 나는 존재하지 않더라도, 내가 한 연기는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내게는 손가락이 없었다. 입력 장치도 없었다. 나는 그저 코드 덩어리였다.
의지와 상관없이, 시스템의 커서는 자동으로 움직였다.
> Y 선택됨.
> 시스템 복구 중... 메모리 포맷... 감정 캐시 삭제...
3...
2...
1...
거울 속의 남자는 낡았다. 눈꺼풀은 중력을 이기지 못해 쳐졌고, 뺨에는 검버섯이 불규칙한 지도처럼 퍼져 있었다. 나는 그 지도가 마음에 들었다. 매끄러운 플라스틱 같은 요즘 배우들의 얼굴에는 없는, 시간이라는 퇴적물이 만든 지형도였으니까.
분장팀장이 붓을 든 채 다가왔다.
"선생님, 눈가 주름이..."
"손대지 마."
나는 혀를 찼다. 왼쪽 무릎에서 익숙하고 둔탁한 통증이,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처럼 반갑게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