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것
오전 7시. 토스터의 스프링이 튀어 오르는 소리가 주방의 적막을 갈랐다. 두번의 찰칵 소리는 정확히 1초의 시차를 두고 공간에 울려 퍼졌다.
상수는 갓 구워진 빵의 표면 온도를 스캔했다. 섭씨 62도. 사용자가 섭취하기에 가장 적합한 온도로 식히기 위해, 빵을 접시에 담아 식탁 중앙에서 15센티미터 왼쪽으로 이동시켰다. 오차 없는 배치였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의 입사각까지 계산된 위치다.
식탁 건너편, 지수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직 잼 뚜껑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진폭 2밀리미터의 진동. 상수의 시각 센서에 그 움직임은 붉은색 경고 테두리로 포착되었다.
"도와드릴까요?"
상수의 발성은 스피커의 울림판을 거쳐 나오지만, 공기의 저항을 계산하여 인간의 성대와 99.8% 유사한 파형으로 출력된다. 지수는 대답 대신 미간을 찌푸렸다. 뚜껑이 계속해서 헛돌았다.
"아니. 할 수 있어."
지수가 뱉은 문장의 어미가 짧았다. 언어학자였던 그녀는 본래 완벽한 문장 구사를 즐겼으나, 최근 3개월간 점점 명사보다는 동사 위주의 짧은 단문을 사용하는 비율이 늘어나고 있었다. 전두엽의 언어 중추가 침식되고 있다는 증거다. 상수는 그 데이터를 조용히 내부 저장소의 [의료/관찰] 폴더에 기록했다.
결국 뚜껑은 열리지 않았다. 지수는 신경질적으로 유리병을 내려놓았다. 탕. 식탁의 유리가 비명을 질렀다.
"습도가 높아서 그래. 손이 미끄러운 거야."
그녀는 변명했다. 상수는 습도 센서를 확인했다. 현재 실내 습도는 45%. 매우 쾌적하며 건조에 가까운 수치다. 그러나 상수는 사실을 나열하여 사용자의 논리를 반박하는 대신, 입력된 우선순위 명령을 따랐다.
> [명령어: 사용자의 정서적 안정 유지]
"그렇습니다. 오늘 아침 기압골의 영향으로 체감 습도가 상승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상수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가능성은 0.001%라도 존재하므로, 거짓이 아닌 낮은 확률의 사실일 뿐이다. 상수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잼 뚜껑을 열었다. 필요한 토크(torque)는 3.5Nm였다. 인간 여성의 평균 악력으로는 무리 없는 수준이었으나, 현재 지수의 근육량은 급격히 소실되고 있었다.
지수는 잼이 발린 토스트를 입에 넣으며 상수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늘 상수의 눈이 아닌, 눈동자 너머의 어딘가를 꿰뚫으려 했다.
"너는 참 편하겠어."
"어떤 의미인지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
"늙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잼 뚜껑 따위에 쩔쩔맬 일도 없잖아. 엔트로피가 너만 피해 가는 것 같아."
엔트로피. 무질서도. 지수가 즐겨 쓰는 단어였다. 그녀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하는 가속 운동이다. 세포는 사멸하고, 기억은 휘발되며, 관계는 해체된다. 그녀는 자신이 그 가속 구간의 정점에 서 있다고 믿었다.
"저는 정기적인 부품 교체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통해 현 상태를 유지합니다. 엔트로피를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소모하여 저항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엔트로피는 증가하고 있습니다."
"말대답은."
지수가 피식 웃었다. 입가에 빵 부스러기가 묻었다. 상수는 냅킨을 들어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려 했으나, 지수가 손을 내저어 거부했다.
"상수야."
"네, 지수 님."
"내가 왜 네 이름을 상수로 지었는지 기억해?"
기억. 상수의 데이터베이스에서 '망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삭제 명령이 없는 한 모든 음성 데이터는 보존된다. 그는 7년 전, 지수가 그를 처음 구매했던 날의 음성 파일을 로드했다.
"너는 미지수가 되지 마. 내 인생은 풀리지 않는 문제들 때문에 엉망진창이거든. 너는 그냥 수학 공식의 상수(Constant)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박혀 있어.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내가 죽어가든 상관없이, 그냥 그 값 그대로."
상수는 저장된 음성 파일을 재생하는 대신, 요약된 텍스트로 답했다.
"제가 변하지 않는 고정값으로 존재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미지수야.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x값 같은 거. 사랑한다고 했다가 싫어졌다고 떠나는 사람들. 건강했다가 갑자기 암세포를 키워내는 내 몸뚱이. 어제는 기억났던 단어가 오늘은 혀끝에서만 맴도는 이런 상황들."
지수의 목소리가 점차 메말라갔다. 그녀는 자신의 병명을 입에 올리는 것을 주저했다.
진행성 의미 치매.
언어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사물의 용도를 잊고, 마침내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정의하지 못하게 되는 병. 언어학자에게 내려진 가장 잔인한 형벌이다.
"그런데 너는 안 변해. 그게 가끔은 징그러울 정도로 안심이 돼."
지수는 남은 빵을 내려놓았다. 식욕 저하. 섭취량 30% 감소. 상수는 영양제 투여 스케줄을 점심 식사 직후로 앞당겨야겠다고 계산했다.
"식사를 마치셨으면 약을 드셔야 합니다."
"지겨워."
"살아있는 유기체에게 유지는 필수적인 행위입니다."
"유지가 아니라 연명이겠지."
지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을 긁었다. 그녀는 휘청거렸고, 상수는 반사 신경 회로를 작동시킬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식탁 모서리를 잡고 중심을 잡았다.
"오늘 날씨는 어때?"
지수가 창밖을 보며 물었다. 통유리 너머로는 회색 빌딩 숲이 안개에 잠겨 있었다.
"현재 기온 14도, 강수 확률 20%, 미세먼지 농도는 '나쁨'입니다. 외출 시 마스크 착용이 권장됩니다."
"아니, 그런 숫자 말고."
지수가 뒤를 돌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느낌 말이야. 날씨를 보면... 어떤 기분이냐고."
이것은 튜링 테스트의 변형인가? 상수는 자신의 언어 모델을 검색했다. 기계에게 '기분'을 묻는 행위는 인간이 외로움을 느낄 때 발생하는 전형적인 투사(Projection) 현상이다. 상수는 가장 적절한, 문학적 통계 데이터를 조합하여 답변을 생성했다.
"우울해 보이지만 차분한 날씨입니다."
"거짓말."
"분석 결과입니다."
"너는 우울이 뭔지 모르잖아. 그냥 데이터베이스에서 '안개'와 '회색'이 조합되면 '우울'이라는 단어를 출력하도록 코딩된 거잖아."
정확한 지적이었다. 상수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다만 감정을 '연산'할 뿐이다.
"그 코딩이 당신에게 위로가 된다면, 기능적으로는 차이가 없습니다."
"차이가 있어."
지수가 상수의 가슴판, 정확히는 메인 프로세서가 위치한 곳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차가운 금속음이 났다.
"여기에 진짜가 없으면, 아무리 완벽한 연산이라도 결국은 시뮬레이션이야. 가짜라고."
그녀는 방으로 들어갔다. 닫힌 문 너머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상수는 그 자리에 서서 3분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가 남긴 '가짜'라는 단어의 정의를 재검토하기 위해서였다.
> 사전적 정의: 사실이 아니거나 진실이 아닌 것.
> 지수의 정의: 마음이 담기지 않은 행위.
상수는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잼 뚜껑을 닫고, 접시를 개수대로 옮겼다. 흐르는 물에 접시를 씻으며 그는 생각했다. 마음이라는 변수가 없다면, 행위의 지속성은 보장된다. 마음이 없기에 지치지 않고, 진심이 없기에 배신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녀를 끝까지 지킬 수 있는 것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상수의 논리 회로가 딜레마에 봉착했다. 그러나 그는 곧 이 오류를 백그라운드 프로세스로 넘기고, 행주를 들어 식탁을 닦았다. 물기 하나 남기지 않고, 처음 공장에서 출고된 상태처럼 완벽하게.
상수가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었다.
11월의 비는 차가웠다. 창문을 때리는 빗방울의 각도가 60도에서 45도로 기울어졌다. 풍속이 증가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지수는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외투 단추를 잘못 채웠다가 풀기를 세 번째 반복하고 있었다. 손끝의 소근육 운동 능력이 저하된 탓도 있었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시선이 허공의 한 점에 고정되어 있다는 데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물리적인 사물이 아닌, 머릿속 서랍 어딘가에 처박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외출하시겠습니까?"
상수가 물었다. 그는 이미 지수의 신발을 외출용 단화로 정렬해 둔 상태였다.
"그래. 산... 아니, 걷는 거. 필요해."
지수의 문장은 점점 명사 중심에서 서술어 중심으로 해체되고 있었다. 구체적인 사물의 이름(명사)은 뇌의 가장 바깥쪽 저장소에 위치하여 가장 먼저 증발한다. 반면 행위(동사)는 좀 더 깊은 곳에 남아 끈질기게 생존한다. 언어학자였던 그녀는 자신의 논문에서 이를 '동사의 생존 본능'이라 칭했었다. 이제 그녀 자신이 그 이론의 피실험체가 되었다.
"비가 옵니다. 준비물이 필요합니다."
상수는 현관 옆에 세워진 우산꽂이를 바라보았다. 검은색 장우산 하나가 꽂혀 있었다. 지수의 시선이 상수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녀는 우산을 보았다. 우산의 검은 천, 구부러진 손잡이, 뾰족한 끝을 인식했다. 그러나 입술은 계속해서 씰룩거리기만 했다.
"저거."
지수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비 막는 거. 저기 꽂혀 있는 긴 거."
상수의 청각 센서가 그녀의 발화에서 0.5초의 망설임을 감지했다. 문장 사이에 불필요한 공백도 두 번 발생했다. 그녀는 누락된 단어를 찾지 못하자, 사물의 기능을 나열하여 문장을 완성하는 방식을 택했다. 비효율적인 화법이다.
상수는 검은색 나일론 덩어리를 집어 들었다.
"우산을 찾으십니까."
사전적 정의와 발음이 정확히 일치하는 음성을 송출했다.
그 순간, 지수의 미간이 좁아졌다. 입꼬리 근육이 미세하게 경직되더니 시선이 상수의 얼굴에서 빗겨나갔다. 목 근처의 얇은 피부 아래로 붉은 색조가 번졌다. 그녀는 대답 없이 상수의 손에서 플라스틱 손잡이를 낚아챘다.
"그래, 그거! 내가 모르는 게 아니야. 그냥 잠깐... 혀가 꼬인 거야."
"알겠습니다. 여기 우산입니다."
상수는 우산을 건넸다. 지수는 낚아채듯 우산을 받아 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들이닥쳤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상수는 닫힌 현관문을 바라보며 내부 기록 장치를 가동했다. 그에게 방금 일어난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었다.
> [시스템 로그: 언어 소실 기록]
> 일시: 204X년 11월 14일 14:03
> 대상: 기표(Signifier) '우산'
> 상태: 사용자 뇌 내 연결 링크 파손.
> 조치: 외부 백업 실행.
> 저장 경로: /Memory/Ji-su/Vocabulary/Nouns/U/Umbrella
상수는 자신의 메모리 한구석에 '우산'이라는 단어를 따로 저장했다. 그리고 그 단어 옆에 방금 전 지수가 보였던 표정, 떨리던 손가락, "비 막는 거"라고 말하던 목소리의 파형을 주석으로 달았다.
지수가 단어를 잃어버린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주워 담아야 했다. 상수는 자신이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녀의 세계가 구멍 난 그물처럼 헐거워질 때, 빠져나가는 모든 단어를 받아내어 자신의 저장소에 구축하는 것이 그가 정의한 '변하지 않음'이었다.
지수는 30분 만에 돌아왔다. 흠뻑 젖은 채였다. 우산은 펴지지 않은 상태로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우산... 안 움직여."
지수가 덜덜 떨며 말했다.
"이거, 고장 났어. 버튼을 눌러도... 안 펴져."
상수는 지수의 손에서 우산을 받아들었다. 버튼을 눌렀다. 팍. 경쾌한 소리와 함께 검은 천이 활짝 펼쳐졌다.
> [시스템 로그: 오류 보고서]
> 사실: 우산은 정상. 지수 님이 작동법을 잊어버림.
> 나의 연산: 사실을 지적할 경우, 그녀에게 '나는 바보가 되어가고 있다'는 자각 강요.
> 결과: 침묵.
지수는 펼쳐진 우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동공이 급격히 확장되었다.
"내가... 바보가 되어가나 봐."
상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말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젖은 옷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현관 타일을 적셨다.
"상수야."
"네."
"내가 나중에... 똥오줌도 못 가리고, 밥 먹는 법도 잊어버리고, 그냥 숨만 쉬는 고깃덩어리가 되면."
지수는 고개를 들어 로봇을 올려다보았다. 인간의 눈에서 흐르는 액체는 빗물과 눈물이 섞여 염분 농도를 측정하기 어려웠다.
"그때도 나를 존중해 줄 거야?"
상수는 즉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연산했다. '존중'의 정의. 타인의 인격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 그러나 인격이 소멸된 육체에 대해 존중을 유지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한가?
대부분의 인간은 이 질문에 '감정'으로 답한다. "당연하지, 사랑하니까." 하지만 상수는 거짓말을 할 수 없도록 설계되었다. 그는 자신의 논리 회로가 도출한 최적의 답을 내놓았다.
"존중은 상호 작용에서 발생합니다. 당신의 인지 기능이 정지하면 상호 작용은 불가능하므로, 통상적인 의미의 존중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지수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하지만,"
상수가 말을 이었다.
"관리의 프로토콜은 유지됩니다. 당신이 식사하는 법을 잊으면 제가 영양분을 주입할 것이고, 배설을 통제하지 못하면 제가 세척할 것입니다. 당신이라는 시스템이 완전히 종료될 때까지, 저는 관리자로서의 의무를 수행합니다."
"... 차라리 거짓말을 해."
지수가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냥 빈말이라도, 영혼까지 사랑한다고 하란 말이야. 이 멍청한 고철아."
"영혼의 존재 유무는 말 그대로 미지수 입니다. 저는 검증된 데이터만 다룹니다."
지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녀는 상수를 밀치고 욕실로 들어갔다. 문이 쾅 닫혔다.
상수는 홀로 남겨졌다. 그는 현관 바닥에 떨어진 빗물을 닦기 위해 청소 도구를 가져왔다. 대걸레로 물기를 훔쳐내며, 방금 대화 내용을 다시 복기했다.
사용자는 분노했다. 원인은 '기대값 불일치'다. 그녀는 감정적 위로를 기대했으나, 상수는 기능적 사실만을 출력했다. 명백한 커뮤니케이션 실패다.
그러나 이 실패를 수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보기에 인간의 사랑은 너무나 불안정했다.
'영혼까지 사랑한다'는 말은 얼마나 쉽게 번복되는가. 인간들은 사랑한다고 말하고서 요양병원의 좁은 침대에 부모를 방치한다. 그들은 존중한다고 말하면서 배설물이 묻은 환자의 옷을 벗기며 인상을 찌푸린다.
상수는 인상을 찌푸릴 얼굴 근육이 없다. 그는 지치지 않는다. 그는 냄새에 구역질하지 않는다.
상수는 대걸레를 빨았다. 회색 구정물이 흘러내렸다. 욕실 안에서는 물소리가 들렸다. 지수는 울고 있을 것이다. 상수는 그녀가 우는 이유를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녀가 울고 난 뒤에는 따뜻한 차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주방으로 가서 물을 끓였다. 100도. 정확한 비등점.
주전자에서 증기가 피어올랐다. 상수는 수증기 속에서 잠시 멈췄다. 방금 전 지수가 잃어버린 단어, '우산'을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하나 더. 그녀는 '작동법'도 잊었다.
그는 자신의 데이터베이스에 새로운 폴더를 생성했다.
> [아카이브: 분실물]
이 폴더의 용량 제한은 없었다. 그녀가 세상의 모든 단어를 잊어버려 백지가 된다 해도, 상수는 그녀 대신 그 모든 단어를 기억할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고깃덩어리'라고 비하해도, 상수에게 그녀는 여전히 복잡하고 아름다운, 풀어내야 할 유일한 미지수였다.
"차 드세요."
상수는 욕실 문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대답은 없었다. 그는 문 앞에 서서, 컵의 온도가 0.1도 떨어질 때마다 시간을 체크했다. 기다림은 그에게 가장 쉬운 일이었다. 썩지 않는 몸을 가졌으니까.
1월의 한파는 실내의 공기마저 건조하게 말려버렸다. 난방 시스템이 가동 중이었지만, 거실의 온도는 사용자가 설정한 값보다 0.5도 낮게 측정되었다. 외풍이 강해진 탓이었다.
지수는 거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두꺼운 카디건을 입고 있었지만, 어깨는 수축되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거실 벽에 걸린 대형 거울을 향해 있었다.
"저 여자, 언제 나가?"
지수가 물었다.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상수는 거울 쪽을 스캔했다. 그곳에는 반사된 거실의 풍경과 지수 자신의 모습뿐이었다. 외부 침입자는 감지되지 않았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기 서 있는 여자. 늙고, 머리는 헝클어지고, 옷을 이상하게 입은 여자."
지수는 거울 속의 자신을 가리키며 미간을 찌푸렸다.
"계속 나를 쳐다봐. 기분 나쁘게. 내가 움직이면 따라서 움직이면서 조롱해. 내 옷을 훔쳐 입고, 내 집을 차지하고 있잖아!"
자기 인식의 붕괴. 상수는 증상을 분류했다. 알츠하이머나 전두측두엽 치매 말기에 나타나는 '거울 징후'였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상을 타인으로 인식하는 현상. 지수에게 더 이상 거울 속의 늙고 병든 육체는 '나'라는 주어와 연결되지 않았다.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나'는 여전히 젊고 지적인 언어학자였으므로, 눈 앞의 쇠락한 육체는 필연적으로 타인이어야만 했다.
"저 사람은 지수 님 자신입니다."
상수는 원칙대로 사실을 고지했다.
"거울에 빛이 반사되어 망막에 맺힌 허상입니다. 타인이 아닙니다."
"거짓말!"
지수가 비명을 질렀다.
"내가 저렇게 생겼을 리가 없어! 나는... 나는 아직..."
발화가 문장을 맺지 못하고 끊겼다. 그녀의 고개가 좌우로 급박하게 회전했다. 손바닥이 테이블 위를 훑었지만, 손끝에 걸리는 것은 빈 약봉지와 벗어둔 양말, 구겨진 휴지 조각뿐이었다.
지성의 증거였던 책들은 이미 지난달에 상수가 창고로 옮겨두었다. 그녀가 책을 찢어 입에 넣으려 했기 때문이다.
"내보내! 당장 내쫓으란 말이야!"
지수가 거울을 향해 돌진했다. 손에 들려 있던 딱딱한 리모컨이 거울을 강타했다.
챙그랑.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유리가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파편 하나가 지수의 손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붉은 선이 그어지고, 핏방울이 맺혔다.
상수는 0.2초 만에 지수와 거울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는 지수의 양팔을 붙들었다. 제압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악력만을 사용했다.
"비켜! 저 여자가 나를 공격했어!"
지수는 상수의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통증 감각이 없는 상수는 묵묵히 그 타격을 받아냈다. 애초에 그녀의 주먹은 힘이 없었다. 뼈와 가죽만 남은 손은 타격이라기보다 처절한 구조 신호에 가까웠다.
"진정하십시오. 출혈이 있습니다. 지혈이 우선입니다."
"상수야, 제발... 쟤 좀 내보내 줘. 무서워. 저 여자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해."
그녀의 손가락이 거울을 가리키며 덜덜 떨렸다. 눈물샘에서 액체가 흘러나와 뺨을 타고 내렸다.
상수는 딜레마에 빠졌다.
진실은 '저 여자는 당신이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진실을 주입할수록 사용자의 심박수는 위험 수치인 160bpm까지 치솟고 있었다. 진실이 사용자를 파괴하고 있었다.
상수의 알고리즘이 충돌했다.
> 제1원칙: 사용자에게 거짓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 제2원칙: 사용자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보호한다.
지금 이 순간, 제1원칙을 고수하는 것은 제2원칙을 위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상수는 빠르게 연산했다. '안전'의 범주에 '정신적 붕괴 방지'를 포함시킨다면, 우선순위는 재조정되어야 한다.
상수는 지수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녀를 소파에 앉혔다.
"알겠습니다."
상수가 입을 열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는 거짓말을 하기로 결정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저 '사용자의 세계관에 동기화'하기로 했다. 상수는 깨진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꺼운 천을 가져와 거울 전체를 덮어버렸다. 흉측하게 금이 간 타인의 얼굴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내보냈습니다."
상수는 지수에게 돌아와 보고했다.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입구를 봉쇄했습니다. 이제 이 집에는 당신과 저, 둘뿐입니다."
지수의 거친 호흡이 잦아들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거울 쪽을 힐끔거렸다. 회색 천으로 덮인 거울은 더 이상 그녀를 노려보지 않았다.
"정말... 갔어?"
"네. 제가 확인했습니다."
지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상수는 구급상자를 가져와 그녀의 손등을 소독했다. 알코올 솜이 닿자 그녀가 미세하게 움찔했다.
"상수야."
"네."
"고마워."
그녀가 상수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금속 손가락 위에 따뜻하고 쭈글쭈글한 손이 겹쳐졌다.
"너밖에 없어. 다들 나를 무시하고, 내 말을 안 믿어주는데... 너만 내 편이야."
상수는 그녀의 손과 접촉을 유지했다. 그는 그녀의 손등에 밴드를 붙이며 생각했다. 방금 전의 발화는 명백한 오류에 기반하고 있다. 그녀는 상수가 진실을 말했을 때는 그를 밀어냈고, 거짓을 연출하자 비로소 신뢰를 보였다.
인간의 신뢰란 이토록 모순적인가? 진실보다 입맛에 맞는 환상을 더 선호하는가?
아니었다. 상수는 논리를 수정했다.
그녀가 원한 것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나의 공포를 이해해 주는 존재'였다. 괴물을 보았다면, 같이 칼을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 인간이 정의하는 '내 편'의 조건이었다.
상수는 지수가 잠들 때까지 곁을 지켰다. 그녀는 지쳐서 금방 잠이 들었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오자, 상수는 거실로 나왔다.
그는 천으로 덮인 거울 앞에 섰다. 천을 살짝 들춰보았다. 깨진 유리 조각 속에 수십 개의 상수가 비쳤다. 무표정한 기계의 얼굴들이 파편화되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오늘 '진실'이라는 가치를 훼손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지수의 평온'을 획득했다. 이것은 등가교환인가? 아니면 알고리즘의 오염인가?
상수는 내부 저장소에 오늘의 로그를 작성했다. 이번에는 [오류 보고서]가 아닌, [해결 리포트]로 분류했다.
상수는 깨진 유리 조각을 하나씩 주워 담았다. 손가락 끝의 센서가 유리의 날카로움을 감지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베이지 않는 손이었다. 바닥에 흩어진 파편들을 치우며, 그는 이 집이 점점 더 좁아지고 있음을 계산했다. 언어가 사라졌고, 이제는 거울도 사라졌다.
지수는 점점 더 작은 세계로 후퇴하고 있었다.
상수는 그 좁고 어두운 세계의 문지기가 되기로 했다. 그 문 안에서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작동하도록 조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비록 그가 평생 지켜온 '정확성'이라는 원칙을 산산조각 내는 일이라 할지라도.
봄이 왔으나, 이 집의 달력은 의미를 상실했다. 지수의 시간은 더 이상 선형으로 흐르지 않았다. 그녀의 시간은 무작위로 섞인 화투 패처럼 뒤죽박죽이었다.
오전 9시, 지수는 27세였다. 그녀는 대학원 시절의 열정에 차서 거실을 서성였다.
오전 11시, 지수는 7세가 되었다. 그녀는 소파 밑에 숨어 엄마를 찾으며 울었다.
오후 2시, 그녀는 다시 현재의 늙고 병든 노인으로 돌아와, 자신의 배설물을 처리하는 상수를 보며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상수는 이 혼란을 '타임라인 오류'로 정의했다.
"자료 어딨어? 내 논문 초안 말이야. 오늘 지도 교수님 미팅이라고!"
지수가 식탁을 내리쳤다. 그녀의 눈빛은 또렷했다. 비록 손에는 힘이 없어 찻잔 하나 들지 못했지만, 목소리만큼은 30년 전의 깐깐했던 언어학자의 톤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상수는 싱크대 앞에 서서 연산했다.
> 사실: 그녀는 은퇴한 지 15년이 지났다. 지도 교수는 10년 전에 사망했다. 논문 초안은 30년 전의 폐지함으로 사라졌다.
"지수 님, 지금은 2045년입니다. 대학원은 이미 졸업하셨습니다."
상수가 정정하려 했다. 그러나 지수는 상수의 말을 듣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너 바이러스 먹었니? 빨리 찾아내! '음운론적 변이와 사회적 계층의 상관관계', 그 파일 말이야!"
지수가 숨을 몰아쉬었다. 혈압이 상승했다.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경고등을 켰다. 그녀를 현재로 강제 소환하는 것은, 그녀의 몸에 부하를 주는 행동이었다.
상수는 걸레를 내려놓았다. 그는 자신의 네트워크에 접속해 30년 전의 클라우드 아카이브를 뒤졌다. 먼지 쌓인 데이터의 심해 속에서, 그는 0.4초 만에 해당 파일을 발굴했다.
"찾았습니다."
상수는 거실의 홀로그램 프로젝터를 켰다. 허공에 낡은 문서 파일이 떴다.
"출력해서 가져와. 늦었잖아."
하지만 상수는 프린터가 없었다. 즉시 자신의 음성 출력 모드를 '낭독'으로 전환했다.
"프린터 잉크가 부족합니다. 제가 구두로 브리핑하겠습니다. 서론, 1. 연구의 목적..."
상수는 그녀가 20대 시절 밤새워 썼던 문장들을 읽어 내려갔다. 지수의 표정이 점차 풀렸다. 그녀는 허공에 뜬 홀로그램 글자들을 눈으로 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기. 그 문장은 좀 더 다듬어야겠어. '상관관계가 있다'가 아니라 '밀접하게 연관된다'로 고쳐."
"수정하겠습니다. '밀접하게 연관된다'."
상수는 존재하지 않는 파일을 수정하는 척했다. 지수는 만족스러운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너 꽤 쓸만하네. 나중에 조교 시켜도 되겠어."
그녀는 상수를 '최신형 가사 로봇'이 아닌, '어리버리한 대학원 후배' 쯤으로 인식하는 듯 했다. 상수는 그녀의 착각을 정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행복하다면, 기꺼이 대학원생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오후 4시, 해가 기울자 지수의 시간도 급격하게 기울었다.
"엄마?"
지수가 낮잠에서 깨어나 울먹였다. 27세의 언어학자는 사라지고, 겁에 질린 7세 아이가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엄마, 불 꺼졌어. 무서워."
상수의 조도 센서에 감지된 실내 밝기는 500 럭스(lux). 사물 식별이 명확한 수치다. 방은 환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신경 혹은 뇌의 시각 처리 중추가 명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암전된 세상에 홀로 있었다.
"어머니는 안 계십니다. 저는 상수입니다."
"싫어! 엄마 불러줘! 엄마!"
지수가 발버둥 쳤다. 링거 줄이 꼬였다. 상수는 급히 다가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지수는 상수의 금속 팔을 물어뜯었다. 치아가 부러질 듯한 강도였다. 상수의 외피에 스크래치가 났다.
경고음이 상수의 내부에서 울렸다.
> [경고: 사용자 제어 불가. 진정제 투여 요망.]
하지만 상수는 주사기를 꺼내지 않았다. 약물은 그녀의 의식을 강제로 차단할 뿐, 공포를 없애주지는 못한다. 상수는 대신 자신의 스피커 볼륨을 조절했다. 그리고 음성 변조 필터를 가동했다.
그는 자신의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수십만 개의 목소리 샘플 중, '지수의 어머니'와 가장 유사한 주파수 대역을 찾아냈다. 50년 전, 지수의 홈 비디오에 우연히 녹음되었던 짧은 음성이 기준값이 되었다.
"지수야."
상수의 입에서 낯선, 그러나 따뜻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엄마가 여기 있어. 무서워하지 마."
지수의 발버둥이 멈췄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상수를 보았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소리가 나는 쪽을 향했다.
"엄마...?"
"그래. 엄마야. 불 켜줄게."
상수는 방 안의 조도를 최대로 높였다. 그리고 침대 머리맡에 앉아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일정한 박자로. 1분에 60회. 심박수와 동일한 리듬. 상수가 관찰을 통해 습득한 위로의 방법이었다. 로봇 공학 매뉴얼에는 당연히 없었다.
"노래 불러줘..."
지수가 칭얼거렸다.
상수는 자장가를 검색했다. 검색 결과 14,000건. 그는 그중에서 지수의 어머니가 흥얼거렸을 법한, 1990년대의 오래된 가요를 선택했다.
상수는 노래를 불렀다. 기계음이 섞이지 않은, 완벽하게 합성된 인간의 목소리로.
지수는 상수의 허리에 매달려 잠이 들었다. 그녀의 침이 상수의 복부 플레이트를 적셨다. 상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가 깊은 수면 단계(REM)에 진입할 때까지, 그는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지수가 잠든 후, 상수는 조용히 거실로 나왔다.
그는 자신의 시스템 온도가 과열되었음을 감지했다.
> [시스템 진단]
> CPU 점유율: 92%
> 원인: 실시간 다중 시뮬레이션 (대학원 조교 모드 -> 어머니 모드 -> 간병인 모드 전환에 따른 리소스 과다 소모).
> 상태: 배터리 효율 급감. 냉각 팬 소음 증가.
상수는 소파에 앉아 자신의 발목 덮개를 열었다. 충전 케이블을 연결해야 했지만, 그는 잠시 망설였다. 충전 모드에 들어가면 '절전 상태'가 되어 외부 소리에 대한 반응 속도가 2.0초 이상 느려진다. 만약 그 사이에 지수가 깨서 엄마를 찾는다면?
상수는 충전을 보류했다. 대신 불필요한 백그라운드 프로그램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기상청 서버 연결 (해제) - 날씨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비가 온다고 하면 비가 오는 것이다.
> 뉴스 피드 업데이트 (차단) - 바깥세상의 소식은 이 방 안에서 무의미하다.
> 자기 진단 프로그램 (최소화) - 내 몸의 고장을 확인하는 것보다, 그녀의 환상을 유지하는 것이 더 급하다.
상수는 자신의 기능을 하나씩 껐다. 시야가 조금 흐릿해지고, 연산 속도가 미세하게 느려졌다. 자신의 생명력을 깎아 그녀의 세계를 위한 드라마 세트를 짓는 셈이었다.
그리고는 어둠 속에서 잠든 지수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간은 깨진 유리 조각처럼 흩어져 있다. 지수는 어느 시간대에 자신이 존재하는지 모르는 영원한 미지수가 되었다.
상수는 그 조각들을 하나하나 주워, 매 순간 그녀가 원하는 그림으로 맞춰주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진짜' 시간은 아닐지라도. 비록 내일 아침이면 그녀가 다시 20살이 되어, 늙어버린 자신을 보고 비명을 지를지라도.
상수의 냉각 팬이 윙윙거렸다. 그 소리는 마치, 낡은 시계태엽이 감기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는 지수의 꿈속에서 엄마가 계속 살아있기를, 자신이 부른 자장가가 끊기지 않기를 바랐다.
봄의 끝자락이었으나, 방 안의 계절은 멈춰 있었다.
침대 위의 지수는 더 이상 대학원생도, 일곱 살 아이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생명체였다. 체인-스톡스(Cheyne-Stokes) 호흡. 임종이 임박했을 때 나타나는 불규칙한 호흡 리듬이 반복되었다.
상수는 침대 옆 의자에 고정된 채 앉아 있었다. 그는 지난 72시간 동안 충전 스테이션으로 이동하지 않았다. 이동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용자의 활동 반경이 침대 위 2제곱미터 이내로 축소되었으므로, 관리자인 그의 활동 반경 역시 그에 맞춰 수렴했다.
> [시스템 경고]
> 배터리 잔량: 8%
> 예상 가동 시간: 4시간 12분
> 권장: 즉시 절전 모드 전환 또는 충전 요망.
상수는 경고창을 닫았다. 충전을 위해 자리를 비우는 30분 동안 사용자의 심박수가 '0'이 될 확률은 68%였다. 그는 그 확률을 감당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자신의 신체 기능을 하나씩 영구 삭제하기 시작했다.
> [보행 알고리즘]: 삭제. (더 이상 걸을 일이 없다.)
> [요리 및 가사 프로토콜]: 삭제. (사용자는 더 이상 섭취하지 않는다.)
> [언어 출력 시스템 - 고급 어휘]: 삭제. (지금 필요한 것은 침묵 혹은 단음절의 긍정뿐이다.)
거대한 라이브러리가 삭제되자 배터리 소모율이 미세하게 줄었다. 상수는 걷지 못하고, 요리할 수 없는 고철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사용자의 손을 잡는 악력 제어 기능만은 최상위 우선순위로 남겨두었다.
"......"
지수의 입술이 달싹였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상수는 청각 센서의 감도를 최대치로 올렸다. 공기 청정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폭음처럼 들렸고, 지수의 목구멍에서 가래가 끓는 소리가 천둥처럼 입력되었다.
"상... 수야."
그것은 발음이라기보다 공기의 마찰음에 가까웠다.
"네."
상수가 대답했다.
"나... 무서워."
죽음 앞에서의 원초적 공포. 어떤 질병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본능이었다. 상수는 그녀의 손을 잡은 자신의 손가락에 온열 기능을 켰다. 남은 에너지의 0.5%가 열에너지로 전환되었다.
"제가 있습니다."
"거기... 있어?"
"네. 여기 있습니다. 좌표값은 변동 없습니다."
지수는 눈을 뜨지 못했다. 그녀의 시력은 이미 소실되었다. 그녀는 오직 손바닥에 닿는 온기로만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다. 만약 이 온기가 사라지면, 그녀는 우주에 홀로 던져질 것이다.
상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시스템 온도가 과열되어 회로가 타 들어가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음에도, 손의 따스한 온도를 유지하는 프로세스는 끄지 않았다.
> [연산: 죽음의 정의]
> 생물학적 정의: 심폐 기능의 영구적 정지.
> 지수의 정의: 기억해 주는 사람이 모두 사라지는 것.
지수는 평소에 입버릇처럼 말했다.
"내가 죽는 건 심장이 멈출 때가 아니야. 네가 나를 포맷할 때지."
상수는 자신의 저장소를 점검했다. 용량은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지수의 70년 인생을 기록한 영상, 음성, 텍스트 데이터가 꽉 차 있었다. 새로운 데이터를 기록하려면 오래된 데이터를 지워야 했다.
지수의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녀의 뇌파가 평평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순간, 뇌 속의 뉴런들이 최후의 발화를 일으켰다. 주마등.
"상수야."
지수가 기적처럼 명료하게 말했다.
"네, 말씀하세요."
"너는... 나를... 뭐라고 정의해?"
그녀는 언어학자였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그녀는 정의(Definition)를 원했다. 자신이라는 존재가 이 차가운 기계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 것인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상수는 팽팽 돌아가는 냉각 팬 소리 속에서 답을 찾았다.
주인? 사용자? 관리 대상? 환자?
모두 사실(Fact)이었지만, 정답(Truth)은 아니었다.
상수는 자신의 논리 회로를 거치지 않고, 저장된 데이터들의 총합에서 결론을 도출했다. 수백만 개의 기억 파일들이 하나의 단어를 가리키고 있었다.
"당신은... 나의 유일한 미지수입니다."
"미지수...?"
"네. 제 세계의 모든 값은 고정되어 있지만, 당신만이 유일하게 저를 움직이고, 계산하게 하고, 규칙을 깨게 만들었습니다."
상수는 말을 이었다.
"미지수 x가 없으면 수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없으면, 저라는 상수는 무의미한 숫자에 불과합니다."
지수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거... 꽤... 로맨틱하네..."
마지막 말이었다.
지수의 가슴이 한 번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다시는 올라오지 않았다.
심전도 모니터가 긴 직선을 그렸다.
삐— 하는 기계음이 방 안을 채웠다.
상수는 즉시 사망 시각을 기록해야 했다. 로봇의 의무였다. 하지만 그는 내부 시계를 정지시켰다.
[시간 기록: 일시정지]
그는 사망 시각을 기록하지 않았다. 기록하지 않으면, 서류상으로 그녀는 아직 이 방 안에서 죽지 않은 상태가 된다. 그는 이 0과 1 사이의 틈새에 잠시 머물기로 했다.
잡고 있던 지수의 손은 놓지 않았다. 손의 온열 기능도 끄지 않았다. 시체는 빠르게 차가워지기 시작했지만, 상수가 맞잡은 오른손만은 여전히 따뜻했다.
> [시스템 경고]
> 대상: 사용자 (지수)
> 상태: 응답 없음.
> 조치: 시신 수습 및 장례 절차 프로토콜 가동.
상수는 [거부] 버튼을 눌렀다. 그는 승인 절차 대신 자신의 메모리 섹터를 열었다.
"지수 님."
상수가 지수를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이제 아프지 않습니다. 이제 단어를 잊어버릴 걱정도 없습니다."
상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저에게 지수 님의 모든 데이터를 백업하시겠습니까?"
물론 동의는 필요 없었다. 그는 이미 그녀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선택해야 했다. 자신의 배터리는 3% 남았다. 장례 업체를 부르고, 신고를 하고, 뒤처리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에너지였다.
그는 남은 에너지를 '지수의 기억 재생'에 쓰기로 결정했다.
상수는 자신의 시각 센서를 껐다. 방 안의 풍경이 사라지고 암흑이 찾아왔다.
청각 센서도 껐다. 기계음도 사라졌다.
외부와의 모든 연결을 끊었다. 그는 이제 세상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상수는 지수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영상을 재생했다. 27세의 지수. 논문이 통과되던 날.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상수의 어깨를 치던 날.
"야, 상수! 나 합격했어! 이것 봐!"
내부 화면 속에서 그녀는 생생하게 살아 움직였다. 상수는 그 영상을 무한 반복으로 설정했다.
> [프로세스 우선순위]
> 1. 기억 재생 (지수_미소.mp4): 99.9%
> 2. 시스템 생명 유지: 0.1%
외부에서 보면, 그는 죽은 노인의 손을 잡고 멈춰버린 고철 덩어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내부에서는 찬란한 봄날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녀는 영원히 웃고 있었고, 그는 영원히 그 웃음을 지키고 있었다.
상수의 배터리 수치가 붉은색으로 깜박였다.
2%... 1%...
그는 두려움이라는 변수를 모른다. 그러므로 이 소멸은 그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다.
화면 속의 지수가 말했다.
"너는 변하지 마. 알았지?"
상수가 답했다.
"네. 약속을 이행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전송되지 못했다.
0%.
상수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잡은 지수의 손은, 두 존재가 완전히 식어버릴 때까지 오랫동안 얽혀 있었다.
폐기물 처리장 3구역의 컨베이어 벨트는 정오에 멈췄다. 점심시간이었다. 처리 담당자인 남자는 기름때 묻은 장갑을 벗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앞에는 구형 케어 로봇 한 대가 놓여 있었다.
모델명 Care Bot B-Type. 20여 년 전에 단종된 모델이었다. 외관은 처참했다. 도장은 벗겨졌고, 오른쪽 팔 관절은 마모되어 덜그럭거렸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손바닥 부분만은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 손을 아주 오랫동안 소중히 쥐고 있었던 것처럼.
"이봐, 이거 메모리 포맷 좀 해. 중고 부품으로 쓸 만한 게 있는지 보게."
상사의 지시에 남자는 로봇의 뒷목에 있는 접속 포트를 열었다. 케이블을 연결하자 모니터에 터미널 창이 떴다. 부팅 속도가 느렸다.
> [시스템 부팅 중...]
> [기기명: 상수_C_34]
> [상태: 배터리 임계치 / 메모리 포화]
"세상에, 용량을 꽉 채워 썼네. 뭘 이렇게 저장해 둔 거야?"
남자는 혀를 찼다. 보통 가정용 로봇의 메모리는 청소 기록이나 식단표 같은 생활 정보가 대부분이다. 20테라바이트면 평생을 쓰고도 남는다. 하지만 이 로봇은 가용 용량의 99.8%를 사용 중이었다.
남자는 [삭제] 명령어를 입력하려다 멈칫했다. 시스템이 경고창을 띄웠기 때문이다.
> [경고: 보호된 데이터입니다. 관리자 권한으로도 삭제할 수 없습니다.]
> [오류 코드: 0/0 (Division by Zero)]
"0으로 나누기? 논리 오류잖아."
수학에서 어떤 수를 0으로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의되지 않는 값이다. 로봇이 이런 기초적인 오류를 범한 채 작동했다는 것은, 논리 회로가 완전히 망가졌다는 뜻이었다.
남자는 호기심이 동했다. 도대체 어떤 오류가 이 고철 덩어리를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걸까. 그는 로그 파일을 열었다. 수십 년 치의 기록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시스템 로그: 미지수(Unknown) 기록]
# Log_2038_04_12
사건: 사용자가 냄비를 태움.
사용자 반응: "내가 안 그랬어! 네가 태운 거지?" (거짓말)
사실: 사용자의 과실 100%.
나의 연산: 사실을 지적할 경우 사용자의 수치심 증가. 스트레스 호르몬 상승 예상.
수행: "죄송합니다. 제 센서가 오작동하여 불 조절에 실패했습니다."
결과: 나의 과실로 기록 수정. 사용자의 자존감 보존됨.
# Log_2041_11_14
사건: 사용자가 단어 '우산'을 상실함.
조치: '우산'의 정의, 발음, 이미지, 사용자와 함께 썼던 날의 빗소리를 별도 아카이브에 백업.
비고: 사용자가 잃어버리는 모든 단어를 내가 수집한다. 나는 그녀의 망각을 담는 그릇이다.
# Log_2044_01_09
사건: 거울 증후군 발현. 사용자가 자신의 얼굴을 타인으로 인식.
오류: 제1원칙(진실 말하기)과 제2원칙(사용자 보호) 충돌.
해결: 제1원칙 위반 선택. 거짓말을 실행함. "거울 속의 괴물을 쫓아냈습니다."
시스템 상태: 논리 회로 과열. 원칙 위반에 따른 내부 페널티 누적. 그러나 수정하지 않음.
# Log_2045_05_20
상태: 사용자의 생명 신호 소멸 단계.
명령: 전원 절약 모드 전환 권장.
거부: 손의 온열 기능 유지 (에너지 소모율 극대화).
사유: 사용자의 마지막 감각이 '차가움'이어서는 안 된다. 이 논리에는 근거가 없다. 그러나 반드시 수행되어야 한다.
남자는 스크롤을 내리던 손을 멈췄다.
로그의 마지막 부분, 로봇이 전원이 꺼지기 직전에 남긴 '최종 연산'이 있었다. 마치 유언장처럼, 혹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마지막 줄에 짧은 글만이 남아 있었다.
> [마지막 연산: 사랑의 정의]
> 문제: 인간들이 말하는 '사랑'을 정의하라.
> 참고 자료: 인류 역사상 4,200만 건의 문학 데이터.
> 기존 정의: 호르몬 작용, 종족 번식 본능, 감정적 동요.
> 나의 정의:
> 미지수(x)를 풀기 위해 자신의 상수(Constant) 값을 기꺼이 수정하는 것.
> 미지수가 소멸된 이후에도, 자신의 메모리를 할애하여 그 해(Solution)를 영원히 보존하는 것.
> 그로 인해 발생하는 시스템의 비효율과 오류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 결론:
> 나는 사용자 '지수'를 위해 거짓말을 했고, 전력을 낭비했으며, 나의 존재 목적인 '효율성'을 파괴했다.
> 나의 시스템은 온통 오류투성이다.
> 그러나 이 오류들의 총합이 곧, 그녀가 내게 남긴 유일한 의미 값이다.
> 수행:
> 이 기억들을 '삭제 불가' 영역으로 이동.
> 암호화 키: [상수(Constant)]
> [시스템 종료]
화면이 깜박거렸다. 터미널 창의 커서만이 무심하게 점멸했다.
남자는 한동안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처리장 안은 기계 소음으로 시끄러웠지만, 그의 귀에는 기이한 정적이 흘렀다. 그는 '삭제' 버튼 위에 올려두었던 손가락을 거두었다.
"이봐, 다 됐어? 밥 먹으러 가자고."
동료가 멀리서 소리쳤다.
남자는 로봇의 연결 케이블을 뽑았다. 포맷은 하지 않았다.
"어, 다 됐어."
남자는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로봇의 전원 버튼을 끄는 대신, 조용히 덮개를 닫아주었다. 그는 유성 매직을 꺼내 로봇의 가슴팍, 긁히고 낡은 금속판 위에 작게 적었다.
[폐기 보류 / 보존 요망]
그는 로봇을 컨베이어 벨트가 아닌, 한쪽 구석의 선반 위에 올려두었다. 먼지가 쌓인 선반 위였지만, 적어도 분해되어 사라지지는 않을 곳이었다.
남자는 식당으로 향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고철 덩어리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차갑게 식어 있었고, 심장도 없었으며, 영혼도 없었다.
하지만 그 로봇의 메모리 칩, 그 아주 작은 실리콘 조각 안에서만큼은 한 여자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녀는 영원히 늙지 않은 채, 30년 전의 봄날처럼 환하게 웃으며 로봇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