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견 없이 나를 바라봐주는 새로운 사람들이 더 편할 때가 있었다.
어? 안경 벗었네?
학창 시절, 안경을 벗으면 나도 어색하고 나를 보는 사람도 어색했다. 그 어색한 공기에 휩싸이면 다시 안경을 쓰고 싶어 지곤 했다. 대학에 입학해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스무 살이 되던 해. 어느 정도 계획된 그 시기에 오랫동안 끼던 안경을 벗었다. 나를 처음 본 대학 동기들은 안경을 끼지 않은 내 모습이 원래 내 모습이라고 생각해 주었다. 그 안에서 나는 렌즈를 낀 내 모습에 익숙해졌고, 어린 시절 친구들을 만날 때에도 안경을 끼지 않고 마주 할 수 있게 되었다. 당당한 내 모습에 기존 친구들도 어색하지 않게 된 것이다.
지금도 집에서는 안경을 끼지만 이제는 안경을 끼고 다니는 게 더 어색하다. 안경을 벗고 렌즈를 낀 모습이 더 익숙하고 좋다. 그러나 처음 안경을 벗었던 그때는 그 모습이 너무 어색했다. 낯설기만 했고, 안경을 벗은 내 모습이 더 나은 게 맞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대학에 입학하던 그 시기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안경을 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적응기간이 필요했던 것인데 말이다. 처음이 어색하다고 해서 예전의 모습이 더 나은 것은 아니었다.
선입견 없이 나를 바라봐주는
새로운 사람들이
더 편할 때가 있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하다 보면 내가 모르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나는 원래 말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특히나 나에 관한 얘기라면 더욱더 말을 아끼곤 했다. 그런데 얼마 전,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하는 모임에서 말하고 싶어 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특정 주제에 관해서는 말하기를 좋아했던 것일까? 친한 친구들과 있을 때보다도 더 많은 얘기를 한 것 같다. 나의 새로운 모습을 만난 것이다. 스스로도 낯설었지만 이 모습이 더 나다운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이래야 한다는 틀을 벗어던진 느낌이었다.
페이스북이 아닌 블로그를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숨겨져 있던 나의 모습을 만나기 위해서. 내 안에 A, B, C 가 있는데 A의 모습으로만 살아온 듯했다. B와 C를 이끌어내고 싶었다. 나는 A일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보면 B와 C는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사라질 것만 같았다. 낯선 여행지에서 새로운 나를 만나듯 낯선 사람들과 소통하며 나를 찾아갔다.
맥주를 좋아하고, 의견을 말하는 것을 좋아하며, 새로운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고, 6개월 이상 블로그를 하고 있으며, Kings of convenience의 음악을 즐겨 듣고, 책을 좋아하고, 명상을 하며, 글쓰기를 배우고, 철학 강연을 들으러 다니는 사람. 이게 나라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말하려면 아직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새로운 나에게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어차피 이건 내 인생이고, 남들이 뭐라 하건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면 된다. 책임만 내가 지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이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나조차도 불안하고 확신이 없기 때문일까? 내가 하고자 하는 것들이 보편적인 선택도 아니고, 곧바로 수익과 연결되는 일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작아지게 만들 때도 있었다. 차라리 누구나 끄덕일 만한 멋진 목표가 있었다면 당당했을까? 그러나 그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님을 이제는 잘 안다.
이럴 때일수록 흔들리지 않을 나만의 기준이 필요했다.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단해져야 했다. 그리고 그 단단함에 내 스스로가 익숙해질 때까지는 잠시 숨어있기로 했다. 안경을 벗은 내 모습에 익숙해지는 동안 처음 만난 대학 동기들과 함께 했듯이, 틀을 깨고 나오는 이 순간에도 새로운 인연들이 많아 참 다행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보다
중요한 건 내가 느끼는 나였다
[다음편] 새로 산 운동화, 버리기로 마음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