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름 무렵이 되면 다양한 나물류와 껍질채로 판매되는 견과류가 나온다. 그중에서 호두와 피땅콩을 사 와 까먹었다. 껍질을 하나하나 깨면서 시간을 들여 까먹어서 그럴까, 또는 껍질에 흙의 느낌이 남아있어서 그럴까, 아니면 호두 한 알 두 알, 땅콩 세 알 네 알이 몸을 일깨워서 그럴까?
아침에 일어나 호두와 피땅콩을 까먹으며 불현듯, 어느 지역, 누구의 손을 거쳐 내 손에까지 닿았는지 궁금하다. 새삼스럽게 호두알을 만지고, 땅콩알을 만져본다.
나는 이빨도 안 좋으면서 딱딱한 견과류를 좋아한다. 물론 몸이 원해서일 수도 있고, 아그작아그작 깨물면서 나도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좋지 않은 이빨로 인한 평소 억눌린 감정에서 견과류를 찾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정제되어 나온 깨끗한 견과류를 먹을 땐 그 맛에 감탄할 때가 있었지만 생산지는 어디고, 생산자는 누구인가에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호두나무를 직접 본 적도 열매를 따본 적도 없지만, 땅콩을 심고, 밭을 매고, 쇠스랑으로 캐서 따본 적은 많다. 땅콩 수확철이 되면 중고등학생도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어서 언니들을 따라 땅콩을 따러 가곤 했다. 땅콩밭에 앉아 뿌연 먼지 속에서 땅콩을 따던 기억은 노동이었다기보다는 스포츠에 가까웠다. 많이 딴 마대에 찬 무게에 따라 금액이 매겨졌기 때문에 경쟁이고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호두를 까먹을 때 수고스러움이 있고 피땅콩에서는 먼지가 일었지만 저 어딘가에 존재하는 또 다른 실재하는 타자를 떠올리고 내 어릴 적 체험을 소환할 수 있었다. 호두와 피땅콩을 먹으며 나는 지금 여기에 있지만, 저 먼 지역,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 사람을 생각하고, 그들과 연대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껍질이 단단하고 알맹이마저 단단해서 그럴까. 흙에서 나고 자라서 그럴까. 호두와 피땅콩을 까먹으며, 여기 함께 있지만 피상적인 관계보다는 저 멀리 있는 호두와 땅콩을 수확한 이가 더 실재적이라는 생각마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