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와 하루 사이
수진역은 처음이었다.
아침 7시에 출발해, 수진역에 도착했을 때에는 오전 9시 전이었다. 약속 장소는 걸어서 5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었고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처음 가보는 수진역은 새롭고 뭔가 널찍널찍했다. 나는 개찰구를 지나 역사 안 벤치에 앉아 책을 읽었다. 지나는 사람도 드물고 책도 재미있어서 책 읽기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내가 앉은 벤치 가까이로 누군가 다가오더니 짐을 내려놓는다. 나는 책 속 글자를 따라가면서도 '비어있는 벤치도 많은데 굳이 여기'라는 생각을 잠깐 하고는 이내 다시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옆에서 "화장실 다녀오려는데 잠깐 짐 좀 봐주실래요?" 하는 것이 아닌가? 20대 초반은 젊은 여성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었다. 어렸을 때나 내가 젊은 시절을 보낸 시기에는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짐을 맡기고 용무를 보고 오곤 했다. 하지만 지금이 어느 시국이라는 말인가? 이리도 젊은 여성이 자신의 짐을 남에게 부탁을 한다고?
거절할 수 있다면 거절하고 싶었지만, 거절하지 못하고 그러마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책 속 글자를 따라 읽었다. 하지만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로 옆 짐 쪽으로도 눈길을 못 주고, 그렇다고 주인이 언제 나오나 이제나저제나 하는 눈빛으로 화장실 쪽을 향할 수도 없고,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젊은이의 예상은 옳았다. 나는 내 짐도 아닌 잠시 맡기고 간 젊은이의 짐을 사생결단을 하듯 지켜낼 것이다. 어떤 악마가 나타나 원래는 내 짐이었는데 저 화장실 간 젊은이가 뺏어갔다며 얼른 내놔라 해도 나는 아마 지킬 것이다. 짐을 하나 봐주면서 나는 무슨 무협지의 장면을 연상 해댄다.
5분이 10여 분이 지난 느낌이다. 드디어 젊은이가 모습을 보이고, 나는 짐에서 해방되어 어찌나 홀가분해졌는지 모른다.
처음 가본 수진역 벤치에 앉아 나는 큰 임무를 하나 수행한 듯 뿌듯하기까지 하다.
내 짐을 스스로 챙기고 누구에게 맡기는 사람은 아니며, 젊은이에게 말할 수 있는 찬스라도 주어진다면 자신의 짐은 자신이 챙기라고 훈수라도 두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나도 젊은이처럼 믿을만한 사람을 알아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뭐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생색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사람을 믿지 못하는 나는 때로는 젊은이처럼 자신의 짐을 맡겨도 좋을 사람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눈을 갖고 싶다.
이른 오전 시간 생전 처음 가본 8호선 수진역 벤치에 앉아서 나는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 속에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