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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이랑 Dec 08. 2023

모든 충동에는 이유가 있구나!

영화 <괴물>을 보고


영화를 보고 나왔다. 평소보다 나는 힘을 빼고 터덜터덜 걷는다. 뭐가 중하랴.


그렇게 전철에서 내려 우리 동네 길거리를 걷고 있는데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렸다.  동네 골목 울리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이제는 <괴물> 속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치환된다.


이 영화는 사실 아무 정보 없이, 그냥 가서 봐야하리라.


나는 바보일 때도 많지만 아주 바보는 아니라서 정곡을 찌르면 안 되는 때를 알고, 스포일러를 하면 안 되는 영화 정도는 알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도 스포 요주의 포인트가 있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도 스포일러를 해서는 안 되는 영화다.


내게 '스포일러'라는 말은 '정곡'이란 말과 뭔가 같은 느낌이 든다. 어떤 대상에게든 정곡을 찔러서는 안 된다. 충동적으로 말한 나의 한 마디 말로 그 존재가 치명상을 입게 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떤 존재에게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할 때가 있다. 이는 어쩌면 충동적인데 이 또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래도 치명상을 주는 정곡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괴물>은 3부 다중시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익히 알고 있듯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에서 아역 배우의 비중은 장난이 아니다. 감히 말하건대 이번 영화에서 정점을 찍었다.


<괴물>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신발이었다. 내가 발 딛고 살아가야 할 바깥, 즉 사회라고 하는 현실에서 '신발'의 상징성에 주목한다. 옷이라고 하는 사회성, 페르소나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영화 <괴물>을 보면서 신발이라는 페르소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의 핵심인물인 유리는 맨발로 사회 속으로 내몰린다. 유리에게 신발 한쪽을 건네주는 존재는 미나토이다. 그런데 미나토의 신발과, 유리의 신발과, 호리 선생님의 신발이 묘하게 동일해 보인다.


이들은 같은 존재일까?

그래서 호리 선생님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챈 것일까?

호리 선생님 본인이야말로 본성을 버리고 기성세대가 지닌 사회적 편견 속에서 '새로 태어난(生まれ変わった)' 존재인 것일까?


3부를 이끄는 미나토는 엄마의 시점인 1에서  갑자기 엄마가 운전하는 차문을 열고 뛰어내린다. 엄청나게 위험하고 충동적이다. 영화를 보면서 "얘가 어째 이런디야, 왜 이렇게 위험한 행동을 헌디야, 너무 충동적인디"란 생각을 했다. 그런데 3부로 가면 그 충동적인 행동을 알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밝혀서는 안 된다.


나는 지금껏 '충동'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었지만, <괴물>을 보고 나서야 아아, 그 누군가의 어떤 충동적인 행동에는 모두 이유가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새로 알게 된 이 사실 덕분에 내 편협한 관점과 인간에 대한 이해확장는 방향으로 나아가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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