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티 크라우더,『메두사 엄마』(김영미 옮김, 논장, 2018)
<그림책 한번 읽어볼까?>
키티 크라우더의 『메두사 엄마』
키티 크라우더의 『메두사 엄마』는 엄마와 딸의 성장을 담은 그림책이다. 아이를 홀로 낳아 키우는 메두사 엄마는 딸 ‘이리제’를 너무나 사랑하여 자신의 기다란 노란 머리카락 속에 딸을 칭칭 싸 감고 놓아주질 않는다. 메두사 엄마와 딸 이리제 둘만의 꿈결 같은 생활은 이리제가 또래들과의 생활을 동경하고 학교 가기를 희망하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분석심리학자 융은 『원형과 무의식』에서 “지나치게 걱정하는 어머니의 아이들이 보통 꿈에서 어머니를 한결같이 악한 동물이나 마녀로 본다.(p206)”고 하는데, 자신의 세상 속에 딸을 가두고 보호하려고만 한 메두사 엄마가 지금 딱 그런 상황이다.
어마무시하게 딸을 사랑하는 메두사 엄마는 어느 의미에서는 능력 있는 엄마이다. 메두사 엄마의 머리카락은 한꺼번에 여러 일을 해낸다. 갓 태어난 딸 이리제를 머리카락 강보로 감싸 안고 달래면서, 동시에 “메두사의 머리칼이 두 산파의 외투를 집어”각각 하나씩 건네준다. 또 메두사의 머리카락은 이리제를 업고 가면서 동시에 딸이 심심하지 않도록 달팽이를 들어 올려 보여주기도 한다.
이리제는 거의 엄마의 머리카락 속에서 생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메두사 엄마는 딸을 안고 마을 사람들이 사는 거리로 나가 자신의 딸을 소개한다. 하지만 군중 속에 있던 산파 마들렌이 이리제를 향해 손을 내밀자 “안 돼요. 당신은 이리제를 안을 수 없어요. 얘는 내 아이예요.”라며 경계한다.
메두사 엄마는 딸을 향해 “너는 나의 진주야. 내가 너의 조가비가 되어 줄게.”라고 말한다. 엄마의 길고 노란 머리카락만이 아닌 강력한 말 또한 이리제를 감싸 안고 있다. 하지만 이리제는 엄마의 말에 종속되지 않는다.
엄마의 강력한 사랑과 대자연 속에서 자라나 큰 이리제는 “나 학교에 가고 싶어요.”하고 말하고, 엄마가 “내가 널 가르칠 수 있단다!”라고 말해도,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나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고 싶어요.”라며 자신의 말을 한다.
융은 ‘어린이’에 대해, “‘어린이’는 자립하여 성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자신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고서는 성인이 될 수 없다. (『원형과 무의식』, p258)”라고 말하는데, 성장하는 힘을 지닌 어린이 이리제는 자신도 세상 속으로 나아가고, 엄마마저 변모시킨다.
하지만 그림책을 잘 들여다보면 엄마를 변모시킨 것은 딸 이리제뿐만이 아니다. 메두사 엄마가 이리제를 아무도 못 만지게 하여도, 마을 사람들은 “사랑스럽기도 하지!”하며 둘의 곁을 지킨다.
메두사 엄마와 이리제 주위로 모여든 마을 사람들은 다양한 여성과 다양한 남성 어른이다. 이 어른들은 나중에 밝혀지지만 이리제 학교 친구들의 어머니이고 아버지이다. 이때 자녀를 마중 나온 부모 중 양부모가 모두 나온 집은 한 집도 없다.
결정적으로 이리제는 엄마가 키우고, 학교에서 자라고, 마을 사람들이 함께 하지만, ‘아버지의 이름’도 함께 한다. 가타오카 이치타케는 『라캉은 정신분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찾아가는 라캉의 정신분석』이란 책에서 아이가 건강하게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선 ‘아버지의 이름’이 중요하다며, “그것이 반드시 실제의 아버지(자신의 아버지) 일 필요는 없지만, 어머니가 아버지의 존재를 완전히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아버지의 이름’을 가질 수 없게(p194)”된다고 말한다.
다행히도 『메두사 엄마』에는 건장하고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의 이름’을 지닌 존재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중 한 명은 학교 선생님이고, 또 한 명은 동네 학부모이다. 이들은 기꺼이 ‘아버지의 이름’이 되어준다.
이 학부모 어른은 메두사 엄마가 이리제를 마을 사람들에게 처음 소개하는 장면에서 이미 비중 있게 그려진다. 새빨간 하트가 그려진 흰색 티셔츠에 흰색 양복차림의 이 남자 어른은 메두사 엄마와 이리제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서 마치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림책 『메두사 엄마』의 세계관 속에는 쥐가 들끓고, 동심을 잃은 어른들이 판을 치고, 마을에서 아이들이 모두 사라지고 마는 이야기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와는 다른 공동체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있고, 사람들이 있다. 메두사 엄마와 이리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해본 사람은 안다. 내가 일어서서 다시 나아가고자 하면 대자연의 기운이 도와주고, 바로 가까이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마녀였던 메두사 엄마도 이제 엄마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길만 남았다. 그 길에는 성장하는 힘을 지닌 딸 이리제가 있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동네 어른들이 함께 한다. 무엇보다도 메두사 엄마 자신이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지녔다.
‘무지갯빛의’란 의미를 지닌 딸 ‘이리제’의 이름처럼, 모녀의 앞길 무지갯빛 영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