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네 권, 동화책 한 권, 에세이 한 권을 가방에 넣고, 볶은 결명자차를 타들고, 야외 벤치로 간다. 봄날, 햇살이 이글이글거린다. 대낮부터 나온 사람이 없어 나는 혼자 햇살 한가운데에 있다.
“봄볕은 며느리를 쬐이고, 가을볕은 딸을 쬐인다.”라는 옛말이 있는데, 나는 가을볕이 아닌 봄볕을 쬐고 있다. 독서의 계절도 가을이고, 자외선 농도도 가을보다 봄이 더 높다는데 이렇게 봄 햇살 속에 있다.
다행히 들판에는 다양한 벤치가 있다. 햇살을 정면으로 맞이하는 벤치, 바로 옆 나무 그늘이 드는 벤치, 햇살 반 그늘 반 반반인 벤치 등. 나는 집에서는 컴퓨터 앞에 한번 앉으면 꼼짝을 안 하면서, 햇살 아래에 앉자 저절로 움직임이 많아진다.
그늘 벤치로 이동해 결명자차를 마시며 주변을 둘러보고, 그림책 한 권을 보고, 공터를 한 바퀴 돌고, 다시 그늘진 벤치로 가서 그림책 한 권을 더 읽는다. 오고 가는 사람이 없어 이번에는 그림책을 소리를 내어서도 읽어본다.
근처 아카시아 나무에서 쿵쿵쿵 소리가 나서 보니, 오색 딱따구리가 온 힘을 다해 나무를 쪼고 있다. 바로 옆 가지에는 비둘기 한 마리가 앉아있다. 나뭇가지를 한참을 쪼던 딱따구리는 한시도 가만히 있질 않고, 나뭇가지 위아래를 오르락내리락, 이 가지 저 가지를 왔다 갔다 하더니 푸르락 팍팍 다른 나무를 찾아 날아간다. 이만저만 바쁜 게 아니다. 딱따구리가 그러거나 말거나 비둘기는 똑같은 자세로 나뭇가지에 앉아있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이 옆에 둔 책장을 날릴 정도로 존재감이 있다.
다시 그늘 벤치에 앉아 독서에 집중하는데 앙칼진 소리가 난다. 길고양이 두 마리가 싸움이 붙었다. 너무 요란해서 주시하는데 다행히 바로 멈춘다.
여전히 햇살도 강하고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도 세다. 가져간 그림책을 다 읽고 동화책을 꺼낸다. 야외 벤치에서 독서를 하면 집에서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때보다 시간을 잊는다. 시간에서 벗어나 나 또한 자연 속 한 풍경이 된다.
까치 한 마리가 땅 위를 통통 뛰어가다가 나무로 날아가 학학학 숨을 내쉰다. 그렇게 다시 독서에 집중하는데, 언덕배기 아래에서 어르신 한 분이 나물을 캐며 뭐라고 뭐라고 혼잣말을 하신다. 잘 들어보니 친구하고 만나기로 했는데 오지 않아 투덜대는 거였다.
어르신이 내 옆 바로 가까이로 오시더니 만나기로 한 길가를 보며 “◯◯권사님~!”하고 부르신다. 하도 여러 번 부르시길래 말을 건네본다.
“친구분이 안 오세요?”
“약속한 시간이 한참을 지났는데 올 생각을 안 하네. 약속을 하면 맨날 이래.”
“시간이 지나도 안 오면 신경 많이 쓰이더라고요. 알아서 여기로 오시겠죠.”
“만나자고 하는 시간에 준비하는 중이지요.”
“한번 전화해보세요.”
하도 애타게 기다리시길래 내가 권하자 바로 전화를 하신다. “통화 중인지 안 받네.” 하신다. 두 분이 만나는 곳이 도심 속 찻길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꽃이 있고,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초록이 있고, 나물이 있는 들판이어서 다행이다.
어르신은 다시 나물을 캐다가 아래 길가를 향해 “권사님”하고 부르기를 반복한다. 까치가 깍깍깍 큰소리 내듯 공터가 떠나가듯 권사님 이름을 시원하게 내지르신다. 어쩌면 만나기로 한 권사님 집까지 들렸을 수도 있다.
다시 동화책을 집중해 읽고 있는데 드디어 기다리던 권사님 대답 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먼저 불러드리시네요~!” 했더니,
“그런 줄 아니깐.” 안심한 듯 활짝 웃으시며 나물을 캐던 손놀림이 빨라지신다.
약속 시간보다 한참을 늦게 온 친구지만 친구분이 나타나자 앞서 투덜거리던 모습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환하게 반기시더니 권사님을 주려고 챙겨 온 떡을 주머니에서 꺼내 건넨다. 권사님은 마침 집을 나서는데 급한 전화가 와서 바로 나올 수 없었다며 미안해한다.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이 마침내 모습을 보이고, 준비해온 떡이 주인을 찾아가 다행이다. 속속들이 서로를 너무도 잘 아는 두 사람이 무사히 만나서 다행이다. 두 분에게서 수십 년간 함께 해온 시간의 겹과 인생의 연륜을 느낀다.
문득, 야외 벤치에서 독서를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동식물을 마주치게 해 주심이 감사하다. 두 분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나물을 캐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는 나대로 에세이를 펼치고 책에 집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