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 것이 갔는데 단 것이 왔소

에세이 하루와 하루 사이

by 강이랑

몇 주 전에 야외 벤치에서 봄 햇살을 받으며 독서를 할 때 쪽파를 다듬던 처음 보는 어르신이 내게 쪽파를 나눠 주었었다. 그날, 나는 애초에 계획한 도서관 가는 것을 뒤로 미루고 쪽파를 들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갔다. 현관문 앞에 친한 동화작가 분께서 드시고 맛있다 하시며 내게도 보내 준 꿀고구마 택배 한 상자가 놓여있었다.


쪽파 절반을 받은 내게도 어르신께 나누어 드릴 것이 생겼다!


나는 곧바로 쪽파를 냉장고에 넣어두고 고구마 상자를 열어 종이 가방에 꿀고구마를 담았다. 어르신의 집은 몰랐지만, 어르신이 내려가신 길은 알고 있었다. 짐작이 가는 빌라 1층으로 가서 초인종을 누르고 여기에 혹시 80대 여자 어르신이 계시냐고 여쭙는다. 그러자 친절한 집주인 분께서 바로 아래층 어르신 같다고 알려주신다.


아래층으로 가보니 어르신은 어느새 산책을 나가시고 젊은 여성분이 계셨다. 나는 여기 어르신께서 저 위쪽에서 쪽파를 다듬어 제게 절반 나누어 주셨는데 고구마는 그 답례라고 말하고 그 길로 바로 도서관으로 향했었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난 오늘, 그때 피었던 앵두꽃이 다 지고 열매가 송송송 맺힌 걸 보며 벤치에 앉아 있는데 어르신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다가 오신다. 아무래도 쪽파 어르신 같아 여쭤보니, 어르신이 나를 알아봐 주신다.


“고구마 쪄서 잘 먹었소. 쓴 것이 갔는데 단 것이 왔소.” 하시며, “사탕 잡술라?” 그러신다. 나는 순간, “아니요.”했다가 얼른 마음을 고쳐먹고 “또 제가 ‘아니요’ 했네요. 죄송합니다. 받겠습니다. 먹겠습니다.” 대답하며 얼른 손을 내민다.


캐러멜 사탕이다. 네 개나 주셨다. 나야말로 단 것을 받았다. 바로 하나를 먹는다. 등록해둔 인터넷 번역 사이트로 들어온 한일 번역 일을 하다가 잠시 산책을 나온 참이라 꿀맛이다.


어르신은 새우젓을 넣고 파김치를 담가, 오늘 아침에도 먹고 왔는데 맛이 변함없이 좋았다며 다시 쪽파로 파지를 담글 생각이라고 말씀하신다.

어르신은 우리 엄마와 연세가 같았다. 초등학생인 손주분이 할머니가 집을 나서면 지팡이를 짚고 가라고 한단다. 언젠가 발을 접질려 발을 크게 다친 적이 있는데 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셨단다.


어르신은 많은 식구와 함께 사신다. 곡식 알갱이가 많이 떨어진 곳에 먹을 것이 있듯이 형제가 많으면 굶어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며 게으르면 밥 못 벌어먹고 산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뜨끔 한다. 우리 엄마와 같은 말씀을 하신다. 게으른 나는 간신히 밥만 먹고 살고 있는데, 쪽파에 사탕까지 받고, 지인들이 꿀고구마를 보내주고, 쌀을 보내주는 마음들이 하나하나 기적 같기만 하다.


어르신의 이야기를 한참을 경청하다 나는 어르신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와 번역일을 계속한다. 사탕 세 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하나씩 하나씩 먹어가며 번역일에 속도를 내어본다. 사탕의 힘이었을까, 게으르면 밥 못 벌어먹고 산다는 어르신의 말씀 때문이었을까? 나는 헛짓도 안 하고 집중한다. 오랜만에 하는 일본어 번역이라 그런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단 것을 내리 세 개를 먹어서 그럴까? 일본어 단어들이 마구마구 생각난다.


며칠 전에 시장에서 산 쑥버무리를 찜통에 올려놓고 다시 속도를 낸다. 단 것을 먹은 다음에 먹는 쑥버무리의 쓴맛이 좋다.


결국 나는 쪽파를 주신 어르신께 또다시 얻어먹고 말았다. 다 먹은 사탕 봉지를 보니, ‘MADE IN BELGIUM’이라 적혀있다. 태어나서 벨기에 사탕은 첨 먹어봤다. 헉 게다가 캐러멜이 아닌 밀크가 들어간 커피맛 사탕이다. 어쩐지 정신이 번쩍 든다 했더니! 나를 일하게 만든 것은 이 사탕의 힘이었구먼!? 흐억~!


어르신이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주실 때 한 움큼 내 손바닥에 올려주셨었다. 사탕 한 개만 받을 줄 지레짐작하고 있던 나는 참 쫀쫀한 사람이다. 나는 언제쯤 한 움큼 내어줄 날이 올까? 나는 언제쯤 신세 진 분들에게 단 것을 드릴 수가 있을까? 나 스스로 자초해 놓고 내가 처한 상황에 살짝 눈물이 날라고 그런다. 어찌 되었거나 이번 번역일은 나를 밥 먹게 해 줄 것이다.


기적처럼 내게 온 일감에 정성을 다해보자. 단 사탕과 쓴 쑥버무리로 배를 채우고, 게으름과 부지런함을 오고 가며 며칠을 채운다. 어르신이 쓴 맛이라고 표현한 쪽파도 오늘 내가 먹은 쑥버무리도 모두 약이 되는 쓴 맛이다. 단 사탕을 먹은 뒤 쓴 쑥버무리가 반가웠던 것 만큼이나 게으른 내가 있어 부지런함이 빛을 발한다. 사탕도 쑥버무리도 내 몸에 영양을 준 것처럼, 게으름도 부지런함도 내게는 필요했다.


나는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작업한다. 마치 부지런한 커리어우먼이라도 된 듯 밥 벌어먹는 일에 열중한다.



손이 아깝고 마음이 아깝다 (brunch.co.kr)

<쪽파 어르신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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