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하 Apr 06. 2022

마음이 두근두근했어

네 달간 어르신들과의 흙 수업을 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긴 호흡으로 하는 어르신들과의 수업이라 준비를 하며 생각이 많았다. 평균 여든이 넘으신 어르신들이고 문화생활의 경험이 거의 없으신 분들이라 했다. 어떻게 하면 부담감이나, 걱정 없이 편안히 즐기실 수 있을까. 하지만 사실 직접 만나서 시간을 공유하기 전까지는 이런 생각들은 별 의미가 없다.

수업 시간이 되어 이쁘게 모자를 쓰시고 배낭 하나씩 메고 할머니들이 오셨다. 그룹 담당하시는 분도 일흔이 되신 선생님이었다.


‘우리는 잘 못해’,

‘이런 거 안 해봤어’

‘팔이 저려서 할 수 있나’

걱정한 것처럼 처음을 여는 문장들은 ‘안 돼’였다.


하지만 흙을 조금씩 나누어 드리고 밀가루 반죽이라고 생각하시라며 흙 수제비도 떠보고 주물러도 보고, 새알도 만들어 보고 가래떡도 만들어보고 하는 사이 차츰 할머니들의 문장들은 달라졌다.


‘나는 전 부치고 남은 밀가루는 항상 이렇게 남겨뒀다가 수제비를 해 먹어’

‘예전엔 가래떡 다 손으로 이렇게 만들었지’

‘내 새알은 크기가 좀 크네’


할머니들의 삶의 이야기가 흙놀이 안에 조금씩 담기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그리고 본인의 손으로 직접 만든 작은 다육이 화분이 완성될 즈음에는 모두 각자의 흙 작업에 빠져 계셨다.  


수업의 끝즈음 누구보다 느리게, 하지만 집중해서 조용히      작업을 하던  할머니가 말했다.


“나는 말이야. 이걸 하고 있는데 오랜만에 마음이 두근두근 했어”


“그때는 매일이 반짝반짝했어”


스페인 세비야에서 만난 루이사 할머니가 말했었다. 6개월 한 요양원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실습을 나가던 때였다. 요양원이라는 낯선 공간, 잘 만나보지 못한 세대, 게다가 외국어로 하는 실습은 나에게 너무 어려웠다. 실습이 있는 날은 아침부터 걱정과 부담이 한가득이었다. 루이사 할머니는 그 시간에 구세주 같은 분이셨다. 아흔의 할머니는 언제나 흰 백발을 깔끔하게 단장하고 세련된 정장을 입으시고 실습실에 오셨다. 눈과 귀가 점점 안 보이고 안 들려 가끔 답답해하셨지만 한 외국인 실습생의 어설픈 수업에 항상 응원이 되어 주셨다. 그리고 실습의 반은 센터와 이야기해서 그룹 실습이 아닌 루시아 할머니와 개인 실습을 했다. 할머니의 생애를 기록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일주일에 한 번 씩 할머니의 90년 인생을 빼곡히 들을 수 있었다. 여성이 배우기 힘들던 시기에 교육을 받으셨지만 스페인 내전으로 잃어버린 꿈과 삶. 그 희로애락 사이에 할머니는 오래된 노래를 부르시기도 하고, 대체로 알아듣지 못하는 어느 시를 외우시기도 하고, 한참을 뭔가 생각하시며 한껏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어느 과거 즈음을 이야기할 때면 자주 말씀하셨다.


“반짝반짝했어”


어린아이처럼 수줍은 눈으로 “마음이 두근두근했어”라고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그렇게 루이사 할머니가 떠올랐다. 아직 살아계실지. 이미 백세가 넘으셨으니 이미 돌아가셨을 수 있을 것이다. 할머니의 삶의 기록을 잘 정리해서 선물로 드리고 싶었는데 결국 그걸 못하고 온 것이 내내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설렘이 청춘의 특권이라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친구들을 만나면 너무 쉽게 ‘요즘은 뭐 설레는 일이 없어’라고 말하곤 한다.

새로움이 없다고. 이제 설렘 같은 건 다시없지 않겠냐고. 쉽게 단정하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우리 나이의 수순인 냥 합리화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너무 뻔한 시간 안에 뻔한 것에서 설렘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설렘은 새로움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여든 인생에 처음으로 흙을 만지며, 작은 화분을 만들어 가는 할머니의 시간에 문득 등장한 두근거림은 아마 단지 오늘의 새로움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의 시간에 과거의 어디쯤 있던 할머니의 시간이 소환되어 만나는 그런 교차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만났다고, 한껏 설레어 말로 담아내는 할머니의 문장이 너무 좋아서 나도 어느 시간 안에 문득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오늘 말이야. 마음이 두근두근했지 뭐야.”


매거진의 이전글 따릉이 타고 화실가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